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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추하으로

맹자 공손추하 8장 — 연가벌여(燕可伐與) — 천리(天吏)만이 연을 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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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공손추하 8장 연가벌여(燕可伐與) 대표 이미지

공손추하 8장은 燕可伐與(연가벌여)라는 짧은 물음으로 시작하지만, 실제 쟁점은 전쟁의 찬반보다 훨씬 더 깊다. 맹자(孟子)는 연(燕)을 쳐도 되느냐는 질문에 곧바로 가능하다고 답하면서도, 그 가능함이 아무 세력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이 장의 긴장은 바로 그 지점, 곧 정의의 명분과 집행의 자격 사이에서 생긴다.

첫 절에서는 연나라 군주 자쾌와 재상 자지의 일을 들어, 나라를 사사로이 주고받는 일이 왜 성립할 수 없는지를 밝힌다. 맹자(孟子)는 녹봉과 작위를 임의로 남에게 주는 비유를 통해, 나라와 권한은 결코 개인 호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비유 덕분에 燕可伐與(연가벌여)는 단순한 군사 판단이 아니라 공적 권한의 성격을 묻는 질문으로 바뀐다.

둘째 절에서는 맹자가 자신의 답을 둘러싼 오해를 직접 풀어 낸다. 그는 연을 쳐도 된다고 답했을 뿐, 누가 그 정벌을 수행할 수 있는가까지 허락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天吏(천리)와 士師(사사)의 비유는, 잘못을 징벌하는 일은 언제나 정당한 직분과 절차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명분과 직분의 구별을 세우는 문장으로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여기에 더해, 하늘의 뜻을 대신하는 天吏(천리)만이 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읽는다. 그래서 공손추하 8장은 전쟁의 허용 조건을 말하는 장이면서, 동시에 권력과 정의가 어떻게 서로를 제한해야 하는지 묻는 정치철학의 장이 된다.

1절 — 심동이이기사문(沈同이以其私問) — 사사로운 질문과 공적 권한

원문

沈同이以其私問曰燕可伐與잇가孟子曰可하니라子噲도不得與人燕이며子之도不得受燕於子噲니有仕於此어든而子悅之하여不告於王而私與之吾子之祿爵이어든夫士也亦無王命而私受之於子則可乎아何以異於是리오

국역

제나라 신하 심동이 사적으로 찾아와 물었다. “연나라를 정벌해도 됩니까?” 맹자(孟子)는 “된다”라고 답했다. 다만 그 뜻은 子噲(자쾌)가 제 마음대로 연나라를 남에게 줄 수 없고, 子之(자지)도 자쾌에게서 그 나라를 받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만약 어떤 자리에 벼슬하는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여 왕에게 아뢰지도 않은 채 사사로이 녹봉과 작위를 준다면, 또 그 사람이 왕명을 받지 않고 그것을 사사로이 받는다면 과연 옳겠느냐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연나라를 넘긴 일도 바로 그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대목을 명분과 직분이 무너진 사례로 본다. 연(燕)은 군주의 사유물이 아니므로 자쾌가 마음대로 남에게 줄 수 없고, 자지도 그것을 사사로이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맹자(孟子)의 (가)는 무제한 허용이 아니라, 이미 그 정권이 정당성을 잃었다는 판정으로 읽힌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비유를 공과 사의 경계라는 점에서 더 또렷하게 읽는다. 녹봉과 작위, 나라와 백성은 모두 공적 질서에 속하기에 사사로운 호오로 넘길 수 없으며, 정치가 무너지는 시작은 늘 이 경계의 붕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절은 나라를 빼앗을 수 있는가보다, 누가 공적 권한을 사유화했는가를 먼저 묻는 문장으로 이해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이 절은 공동체의 권한을 개인 판단으로 옮기는 순간 정당성이 무너진다고 말한다. 인사와 보상, 직책과 책임은 모두 공적 절차 안에서 다루어져야 하며, 친분이나 호감으로 넘겨지는 순간 조직은 (공)의 질서를 잃고 (사)의 관계망으로 기울어진다. 맹자(孟子)의 비유는 권한 남용이 거창한 폭정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적 전용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날카롭게 보여 준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말은 그대로 살아 있다. 내가 맡은 역할과 책임을 마치 내 소유처럼 다루기 시작하면, 신뢰는 빠르게 무너진다. 가족이든 모임이든 회사든, 공적으로 맡은 것은 내 기분에 따라 넘기거나 처분할 수 없다는 감각이 있어야 (의)와 (분)이 선다. 그래서 이 절은 전쟁의 옳고 그름만이 아니라, 사람에게 무엇을 임의로 다룰 수 없게 만드는지 돌아보게 한다.

2절 — 제인이벌연이어늘(齊人이伐燕이어늘) — 천리만이 정벌할 수 있다

원문

齊人이伐燕이어늘或이問曰勸齊伐燕이라하니有諸잇가曰未也라沈同이問燕可伐與아하여늘吾應之曰可라하니彼然而伐之也로다彼如曰孰可以伐之오하면則將應之曰爲天吏則可以伐之라하리라今有殺人者어든或이問之曰人可殺與아하면則將應之曰可라하리니彼如曰孰可以殺之오하면則將應之曰爲士師則可以殺之라하리라今에以燕伐燕이어니何爲勸之哉리오

국역

제나라가 연나라를 정벌하자 어떤 사람이 맹자(孟子)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제나라에 연나라를 치라고 권하셨다는데 사실입니까?” 맹자(孟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심동이 연나라를 쳐도 되느냐고 묻기에 자신은 된다고 말했을 뿐이며, 그들이 그대로 전쟁을 벌인 것이라는 뜻이다. 만일 누가 정벌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면, 하늘의 뜻을 대신 집행하는 天吏(천리)만이 정벌할 수 있다고 답했을 것이라 말한다. 살인자를 두고 죽여도 되느냐는 질문과, 누가 그를 처벌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다른 것처럼, 이번 제나라의 출병은 연나라를 벌한다기보다 (연)과 같은 방식으로 (연)을 친 것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가)라고 한 대답과 孰可以(숙가이)라고 물어야 할 질문을 엄격히 구분한다. 죄가 있어 정벌의 대상이 된다는 판단과, 실제로 그 죄를 집행할 자격이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살인자를 두고 士師(사사)의 비유를 든 까닭도, 형벌과 정벌 모두 공적 권한에 속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天吏(천리)를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자격이 함께 갖추어진 주체로 읽는다. 단지 상대가 잘못했기 때문에 곧바로 내가 그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마음을 함께 얻은 주체만이 폭정을 토벌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以燕伐燕은 폭정을 미워하는 마음만으로는 왕도적 정벌이 성립하지 않으며, 바르지 못한 주체가 나서면 정벌도 다시 폭력이 된다는 경계로 해석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는 문제를 지적하는 일과 징계하거나 바로잡을 권한을 갖는 일이 다르다는 점이 핵심이다. 구성원의 잘못을 본 사람이 곧바로 심판자가 되어 버리면, 정의의 언어는 곧 보복의 언어로 변질되기 쉽다. 맹자(孟子)는 正當性(정당성)이란 좋은 의도만으로 생기지 않으며, 언제나 적절한 절차와 자격 속에서만 확보된다고 본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구분은 중요하다. 누군가의 잘못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곧바로 단죄의 권한까지 가진 것은 아니다. 바른 분노가 자동으로 바른 행동을 보장하지 않으며, (의)를 앞세울수록 오히려 내 자리와 권한을 더 엄격하게 점검해야 한다. 이 절은 정의를 실행하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그 정의를 감당할 자격이 있는지 먼저 묻는 태도를 요구한다.


공손추하 8장은 연나라 문제를 통해 정치의 본질을 단순하게 끌어낸다. 한대 훈고 전통은 나라와 권한을 사사로이 주고받을 수 없다는 명분의 질서를 강조하고, 송대 성리학은 그 질서 위에서 天吏(천리)라는 정벌의 자격을 더 분명하게 세운다. 두 독법은 모두, 잘못된 정권이 있다고 해서 아무 세력이나 의로운 집행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만난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장이 주는 울림도 분명하다. 잘못을 보았을 때 사람은 쉽게 내가 직접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맹자(孟子)는 그 순간일수록 권한과 절차를 더 신중히 따져야 한다고 말한다. 정의는 분노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공)의 질서와 (의)의 자격을 함께 갖출 때에만 비로소 공동체를 바로 세울 수 있다.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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