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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추하으로

맹자 공손추하 11장 — 은궤이와(隱几而臥) — 안석에 기대 침묵한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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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공손추하 11장 은궤이와(隱几而臥) 대표 이미지

공손추하 11장은 맹자(孟子)가 제(齊)를 떠나는 길 위에서 벌어진 짧은 문답을 담고 있지만, 현자(賢者)를 붙드는 법과 놓치는 법을 매우 선명하게 드러낸다. 장면은 단순하다. 누군가 왕(王)을 대신해 떠나는 맹자의 길을 만류하려 하고, 맹자는 곧장 말을 받지 않은 채 隱几而臥(은궤이와), 곧 안석에 기대어 눕는다.

이 침묵은 냉담한 거절이라기보다, 말이 놓인 자리 자체가 어그러졌음을 드러내는 몸짓에 가깝다. 이미 떠나기로 한 사람을 뒤늦게 붙드는 일, 더구나 군주 곁에서 현자를 편히 머물게 할 조건을 마련하지 못한 채 마지막 설득만 시도하는 일은, 맹자에게는 본말이 뒤집힌 대응이었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중개자의 책임 문제로 읽는다. 군주가 현자를 존중하려면 그 곁에서 뜻을 바로 알아듣고 연결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 고리가 무너졌기 때문에 떠남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장면을 관계의 예(禮)와 존현(尊賢)의 문제로 더 깊게 밀어 넣는다. 겉으로는 공손한 말이라도 실제로는 상대를 머물게 할 도리와 환경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 만류는 이미 예를 잃은 말이 된다. 공손추하 11장은 그래서 침묵의 장면을 통해, 말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자리를 묻는다.

1절 — 맹자거제(孟子去齊) — 떠나는 길의 첫 장면

원문

孟子去齊하실새宿於晝러시니

국역

맹자께서 제 나라를 떠나실 때 길 위의 주(晝)라는 곳에 묵으셨다. 이 한 문장은 이미 대화의 분위기를 정해 준다. 조정 한가운데서 공식적으로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현자가 뜻을 접고 떠나는 도중에 마지막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첫 절을 상황 규정으로 본다. 현자(賢者)가 이미 떠나는 길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제(齊)나라 정치가 맹자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징표이며, 이후의 만류는 본질적으로 늦은 대응이 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떠남의 시점을 더 무겁게 읽는다. 현자(賢者)를 붙드는 일은 마지막 설득의 기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가 평소 머물 수 있는 도리와 환경을 마련했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去齊(거제)는 이미 관계의 균열이 확정된 뒤의 장면이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핵심 인재가 이미 마음을 거두고 떠나는 단계에 들어섰다면 그 뒤의 설득은 대개 사후 대응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면담의 화술이 아니라, 떠나기 전에 어떤 신뢰와 일할 조건을 제공했는지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관계가 멀어진 뒤에야 붙드는 말은 쉽게 진정성을 잃는다. 공손추하 11장은 첫 문장만으로도, 떠남이 시작된 뒤에는 설명보다 먼저 이전의 태도와 구조를 돌아봐야 함을 일깨운다.

2절 — 유욕위왕류행(有欲爲王留行) — 안석에 기대 침묵한 뜻

원문

有欲爲王留行者坐而言이어늘不應하시고隱几而臥하신대

국역

왕을 위해 맹자의 떠나는 길을 붙들려는 사람이 와서 앉아 말을 꺼냈지만, 맹자께서는 대꾸하지 않으시고 안석에 기대어 누우셨다. 여기서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그 만류의 방식과 자리가 이미 어긋났다는 판단을 몸으로 드러낸 행위로 읽힌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不應(불응)과 隱几而臥(은궤이와)를 무례의 표출로 보지 않는다. 이미 떠나는 현자(賢者)를 왕(王)의 뜻으로만 붙들려는 말은 본말이 뒤집혀 있으므로, 맹자가 곧장 논박하지 않고 태도로 거절의 뜻을 보였다고 읽는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장면을 예(禮)의 문제로 해석한다. 상대가 겉으로 정중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장자(長者)를 대하는 순서와 현자(賢者)를 머물게 할 도리를 알지 못한 채 자기 역할만 수행하고 있다면, 그 말은 아직 들을 자리에 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모든 요청에 즉시 답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어떤 요청은 내용 자체보다 요청이 세워진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 곧바로 토론에 들어가는 순간 그 전제를 승인해 버릴 수 있다. 맹자의 침묵은 바로 그 승인 거부로 읽을 수 있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상대의 정성 표현이 곧바로 이해와 존중을 뜻하지는 않는다. 공손추하 11장은 隱几而臥(은궤이와)라는 몸짓을 통해, 때로는 설명보다 먼저 잘못 놓인 관계의 자리를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3절 — 객이불열왈(客이不悅曰) — 서운함과 비유의 전환

원문

客이不悅曰弟子齊宿而後敢言이어늘夫子臥而不聽하시니請勿復敢見矣로리이다曰坐하라我明語子하리라昔者에魯繆公이無人乎子思之側則不能安子思하고泄柳申詳이無人乎繆公之側則不能安其身이러니라

국역

그 객은 불쾌해하며, 자신도 정성을 다해 준비한 뒤 감히 말을 꺼낸 것인데 누워서 듣지 않으시니 다시는 뵙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맹자는 자리에 앉으라고 하며 이제는 분명히 말해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 노(魯)나라 목공(繆公)과 자사(子思), 설류(泄柳), 신상(申詳)의 사례를 들어, 현자를 편히 머물게 하려면 군주 곁과 현자 곁 모두에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중개 실패의 본격적 설명으로 본다. 노목공(魯繆公)과 자사(子思)의 관계가 흔들리고, 설류(泄柳)와 신상(申詳)이 몸을 편히 하지 못한 까닭은, 군주와 현자 사이를 이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읽는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객의 서운함보다 맹자의 비유가 제시하는 관계 윤리에 주목한다. 현자(賢者)를 존중한다면 그를 붙드는 말보다 먼저 그가 편안히 머물 수 있는 도리와 환경을 갖추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만류는 결국 자기 성의만 앞세운 접근으로 머문다고 본다.

현대적 해석·함의

조직에서 누군가 떠나려 할 때 주변 사람이 흔히 하는 실수는 자기 노력과 충성심을 먼저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정성보다 실제로 일할 수 있는 구조와 완충 장치가 있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맹자의 비유는 바로 그 초점을 되돌린다.

개인 관계에서도 비슷하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더라도, 상대가 편히 머물 수 있는 자리와 언어를 만들지 못했다면 그 노력은 자기 기준의 성실함에 머무를 수 있다. 공손추하 11장은 서운함을 토로하기 전에 관계의 조건을 먼저 돌아보게 한다.

4절 — 자위장자려(子爲長者慮) — 누가 먼저 관계를 끊는가

원문

子爲長者慮而不及子思하니子絶長者乎아長者絶子乎아

국역

맹자는 마지막으로, 자네가 장자(長者)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자사를 대했던 옛 사례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니, 도대체 자네가 장자를 저버린 것인가 아니면 장자가 자네를 끊은 것인가 하고 되묻는다. 이 반문은 책임의 방향을 뒤집어, 만류하는 사람 자신이 관계를 성립시킬 조건을 먼저 놓쳤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객에 대한 최종 판단으로 읽는다. 장자(長者)를 위한다는 말이 참이려면, 그 장자가 머물 수 있는 제도와 사람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그 점에서 객의 만류는 충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준이 모자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子絶長者乎(자절장자호)와 長者絶子乎(장자절자호)를 관계 윤리의 핵심 질문으로 본다. 겉으로는 가까이하려 하고 존중한다고 말해도, 실제로는 그 사람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면 이미 스스로 관계를 끊는 방향으로 움직인 셈이라는 것이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의 언어로 바꾸면, 사람을 잃은 뒤 누가 먼저 등을 돌렸는지 따지기 전에 조직이 먼저 머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는지 물어야 한다. 존중은 선언보다 구조로 증명되고, 붙잡는 말보다 평소의 환경으로 판단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반문은 날카롭다. 누군가를 아낀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의 방식과 리듬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면, 겉으로는 붙들어도 실제로는 밀어내고 있을 수 있다. 공손추하 11장은 관계의 단절이 종종 의도보다 조건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공손추하 11장은 아주 짧지만, 현자(賢者)를 존중한다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낸다. 한대 훈고 전통이 중개자의 책임을 강조하든, 송대 성리학이 예(禮)와 관계 윤리를 더 밀도 있게 읽어 내든, 핵심은 같다. 사람을 붙들고 싶다면 마지막 설득보다 먼저 그가 머물 수 있는 자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隱几而臥(은궤이와)는 그래서 단순한 침묵의 장면이 아니다. 그 침묵은 이미 늦어 버린 만류의 형식을 멈춰 세우고, 누가 관계를 성립시킬 책임을 먼저 져야 하는지를 되묻는 몸짓이다. 맹자가 제(齊)를 떠나며 남긴 이 짧은 문답은 오늘의 조직과 인간관계에도 여전히 유효한 기준으로 남는다.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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