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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문공상으로

맹자 등문공상 5장 — 애무차등(愛無差等) — 묵자 이지(夷之)와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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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등문공상 5장 애무차등(愛無差等) 대표 이미지

등문공상 5장은 짧지만 논점이 매우 선명하다. 묵자 계열 인물 夷之(이지)가 내세운 愛無差等(애무차등), 곧 사랑에는 차등이 없다는 명제가 맹자(孟子)의 親親(친친) 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맹자는 추상적인 평등의 언어보다, 사람이 실제로 부모를 대하는 방식과 마음의 움직임을 근거로 논쟁을 끌고 간다.

장 전체의 전개도 치밀하다. 처음에는 (묵)의 장례관과 이지의 실제 행동이 어긋난다는 점을 찌르고, 이어 愛無差等(애무차등)이라는 명제를 직접 받아 비판한 뒤, 마지막에는 부모의 시신을 차마 버려 둘 수 없는 인간의 본심을 꺼내 놓는다. 그래서 이 장은 한 문장짜리 격언보다, 관계의 근본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묻는 논증으로 읽어야 한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이 장을 묵가의 薄葬(박장)과 유가의 厚葬(후장), 그리고 (친)을 우선하는 윤리의 차이를 가르는 논변으로 본다. 이 관점에서는 이지가 끝내 부모 장례를 후하게 치른 사실이, 사람의 마음이 본래 가까운 관계에 먼저 매인다는 증거가 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장을 (인)의 발단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밝히는 본심의 논변으로 읽는다. 사랑을 넓히는 일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이 父母(부모)와 타인을 처음부터 같은 평면에 놓는 순간 一本(일본)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보는 것이다. 愛無差等(애무차등)은 보편 윤리처럼 들리지만, 맹자에게는 인간관계의 뿌리를 흐리는 주장이다.

1절 — 묵자이지인서벽(墨者夷之因徐辟) — 이지의 청과 맹자의 유보

원문

墨者夷之因徐辟而求見孟子한대孟子曰吾固願見이러니今吾尙病이라病愈어든我且往見하리니夷子는不來니라

국역

墨家(묵가)인 夷之(이지)가 徐辟(서벽)을 통해 맹자를 만나 뵙기를 요구하자,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본래부터 만나보기를 원하였으나 지금은 아직 내가 병중이니, 병이 낫거든 내 장차 찾아가서 만나볼 것이니, 夷子(이지)는 올 것 없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이 첫 장면을 단순한 문답의 서두로 보지 않는다. 맹자가 먼저 찾아가겠다고 한 태도에는 논변을 피하지 않되, 그 논의가 예(禮)의 형식과 주도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 실려 있다고 본다. 곧 유가의 논쟁은 감정적 충돌이 아니라, 상대의 학설을 분명히 드러내고 그 근본을 바로잡는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장면을 마음가짐의 차원에서도 읽는다. 맹자는 상대를 만나기 전에 이미 그를 배척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병이 나으면 찾아가겠다고 말한다. 이는 (도)를 밝히는 일은 상대를 꺾는 데 있지 않고, 잘못된 논리를 제대로 드러내는 데 있다는 태도로 해석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장면으로 옮기면, 첫 응답부터 인상적이다. 맹자는 논쟁을 회피하지 않지만 즉시 끌려 들어가지도 않는다. 중요한 논의일수록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대면할지 기준을 세우는 태도가 필요하다. 主導(주도)를 잃지 않는 대화가 결국 더 깊은 문제를 다룰 수 있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비슷하다. 누군가의 강한 주장과 마주했을 때 바로 맞붙는 것만이 성실함은 아니다. 지금 내 상태가 정돈되어 있는지, 이 대화를 어떤 자리에서 해야 하는지 살피는 일도 중요하다. 맹자의 첫 답은 관계를 끊는 말이 아니라, 더 정확한 대화를 위해 시간을 조정하는 말로 읽힌다.

2절 — 타일우구견맹자(他日又求見孟子) — 박장 교설과 후장 실천의 충돌

원문

他日에又求見孟子한대孟子曰吾今則可以見矣어니와不直則道不見하나니我且直之하리라吾聞夷子는墨者라하니墨之治喪也는以薄爲其道也라夷子思以易天下하나니豈以爲非是而不貴也리오然而夷子葬其親이厚하니則是以所賤事親也로다

국역

후일 또다시 이자가 맹자를 만나 뵙기를 요구하자,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이제는 만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의견을 다 말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피차의 도(道)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니, 내 우선 그대의 주장을 바로잡아 보겠다. 내가 듣기로, 이자는 묵가라고 하던데, 묵가는 상을 치르는 데 검소하게 하는 것을 도리에 맞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천하의 풍속을 바꾸려고 생각할 것이니, 어찌 이 검소한 장례를 옳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겠는가. 그런데 이지(夷子)는 자기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데에는 성대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신이 천하게 여기는 방식으로 자기 부모를 섬긴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유가와 묵가의 장례관이 가장 선명하게 갈라지는 자리로 본다. 묵가가 (박)을 내세워 장례 비용과 형식을 줄이려 했다면, 맹자는 바로 그 주장에 선 사람이 실제 부모에게는 (후)를 택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상대의 위선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심이 이론보다 먼저 부모를 향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논증으로 읽힌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葬其親厚(장기친후)를 마음의 근본이 저절로 새어나온 사례로 본다. 이지는 머리로는 兼愛(겸애)에 가까운 평등을 주장하지만, 실제 상례에서는 부모를 특별하게 대했다. 성리학 계열 독법은 바로 이 틈에서 天理(천리)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읽는다. 부모를 향한 무게가 먼저 살아 있다는 뜻이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선언한 원칙과 실제 결정이 충돌할 때 신뢰가 어디서 무너지는지 이 절이 잘 보여 준다.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대한 순간에는 다른 판단을 한다면, 조직은 곧 그 사람의 실제 기준을 읽어 낸다. 原則(원칙)은 말보다 예외가 드러나는 장면에서 검증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그렇다. 내가 믿는다고 생각한 원칙이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반복해 흔들린다면, 그 원칙을 더 밀어붙일 일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지 돌아봐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지를 통해, 인간은 생각보다 관계의 무게를 추상화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3절 — 서자이고이자(徐子以告夷子) — 애무차등과 시유친시의 주장

원문

徐子以告夷子한대夷子曰儒者之道에古之人이若保赤子라하니此言은何謂也오之則以爲愛無差等이오施由親始라하노라

국역

서자가 이 말을 이자에게 전하자, 이자가 말하였다. “유자(儒者)의 도(道)에, ‘옛 성현들은 백성을 사랑하기를 갓난아이를 보호하듯이 했다.’ 하였는데, 이 말은 무슨 말인가. 내 생각은, 사랑에는 차등이 없고 행하는 데는 부모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이지의 주장을 묵가가 유가의 표현을 빌려 자기 입장을 정당화한 사례로 읽는다. 愛無差等(애무차등)으로 사랑의 평등을 세우고, 施由親始(시유친시)로 실천의 순서를 덧붙여 유가와 묵가의 간극을 좁혀 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합은 친소(親疏)의 질서를 인정하는 듯 보이면서도, 사랑의 본체를 이미 평평하게 만들어 놓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문장을 더 미묘하게 읽는다. 부모에게서 시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의 뿌리를 처음부터 동일한 높이에 놓으면 親親(친친)의 두께는 결국 사라진다. 성리학 계열 독법은 이지가 시작점만 가족에게 둘 뿐, 사랑의 근본에서는 父母(부모)와 타인을 같은 층위에 세우는 셈이라고 본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은 공정하게 들리지만, 실제 책임 구조를 흐릴 위험도 크다. 구성원 전체를 존중하는 태도와, 직접 맡은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지는 일은 다르다. 平等(평등)의 언어가 責任(책임)의 차이를 지워 버리면, 조직은 오히려 누구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愛無差等(애무차등)은 매력적인 말이다.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고 싶다는 이상은 분명 귀하다. 다만 부모, 자녀, 가족, 이웃, 낯선 사람을 향한 존중이 같다고 해서 실제 돌봄과 의무의 순서까지 같아질 수는 없다. 이 절은 바로 그 긴장 위에 서 있다.

4절 — 부이자신이위(夫夷子信以爲) — 일본과 이본, 그리고 장례의 본심

원문

徐子以告孟子한대孟子曰夫夷子는信以爲人之親其兄之子爲若親其隣之赤子乎아彼有取爾也니赤子匍匐將入井이非赤子之罪也라且天之生物也使之一本이어늘而夷子는二本故也로다

국역

서자가 이 말을 맹자에게 아뢰자,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이자는 진실로, 사람들이 형의 아들을 친하게 여기는 것을 이웃집 갓난아이를 친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저 ≪서경≫의 말은 비유를 취한 뜻이 따로 있으니, 갓난아이가 엉금엉금 기어서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이 그 갓난아이의 잘못이 아닌 것과 같다는 말일 뿐이다. 또 하늘이 만물을 낼 적에는 근본을 하나로 세웠거늘, 이자는 그것을 둘로 만들고 있으므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一本(일본)과 二本(이본)의 대비를 이 장의 중심 축으로 본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삶을 받았으므로 (친)을 향한 정이 가장 먼저 서고, 그 다음에야 타인에게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赤子(적자)의 비유는 누구나 어린아이를 보고 측은함을 느낄 수 있다는 보편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부모 사랑과 같은 차원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식으로 읽힌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인)의 발로 구조를 밝히는 말로 이해한다. 사랑은 넓어질 수 있지만, 넓어지기 위해서도 먼저 한 뿌리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를 향한 마음을 거치지 않은 보편 사랑은 확장이 아니라 공중에 떠 있는 추상에 가깝다고 읽는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장면에서는 이 절이 보편 원칙과 구체 책임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모두를 존중하는 태도는 필요하지만, 내가 실제로 책임지는 사람과 공동체에 더 깊은 의무를 지는 것은 偏愛(편애)가 아니라 역할의 구조일 수 있다. 一本(일본)이 무너지면 책임의 중심도 흐려진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낯선 사람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귀하지만, 부모와 가족을 향한 (효)와 責務(책무)까지 같은 무게로 평평하게 놓아 버리면 삶의 윤리가 추상화된다. 맹자는 사랑의 넓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넓이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놓치지 말라고 요구한다.

5절 — 개상세상유불장기친자(蓋上世嘗有不葬其親者) — 덮어 묻는 마음과 이지의 수긍

원문

蓋上世에嘗有不葬其親者러니其親이死커늘則擧而委之於壑하고他日過之할새狐狸食之하며蠅蚋姑嘬之어늘其顙有泚하여睨而不視하니夫泚也는非爲人泚라中心이達於面目이니蓋歸하여反虆梩而掩之하니掩之誠是也면則孝子仁人之掩其親이亦必有道矣니라

徐子以告夷子한대夷子憮然爲間曰命之矣삿다

국역

상고(上古) 시대에는 부모를 장사지내지 않는 풍속이 있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부모가 죽자 들어다가 골짜기에 버렸다. 후일에 그곳을 지나다가 보니, 여우와 삵이 시체를 파먹고 파리와 모기떼가 달라붙어 빨아먹고 있었다. 이를 본 그 아들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똑바로 쳐다 보지 못하고 옆눈질로 볼 뿐이었다. 이 사람이 식은땀을 흘린 것은 남들이 볼까봐 식은땀이 난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속마음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다. 이에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삼태기와 흙수레에 흙을 담아 가지고 가서 시신을 가렸는데, 시신을 가린 것이 진실로 옳다면, 효자와 어진 사람이 부모의 시신을 가리는 데에도 또한 반드시 후(厚)하게 하는 도리가 있을 것이다.”

서자가 이 말을 이자에게 전하니, 이자가 멍하니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맹자가 나를 가르치셨도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이 이야기를 (효)와 (인)이 예법보다 앞서 마음에서 먼저 움직인다는 증거로 본다. 부모의 시신을 버려 두었다가 차마 다시 볼 수 없어 덮어 묻는 행동은, 타인이 보기에 민망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래서 장례의 (후)는 사치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을 온전히 형식으로 세우는 길이라고 읽는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中心達於面目(중심달어면목)을 특히 중시한다. 마음의 부끄러움과 측은함이 먼저 일어나고, 예(禮)는 그것을 바른 모양으로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지가 끝내 命之矣(명지의)라고 한 장면도, 단순한 논쟁의 패배라기보다 자기 이론이 실제 마음의 움직임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순간으로 해석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규정과 절차가 어디서 힘을 얻는지 이 절이 잘 보여 준다. 제도는 단지 외부 통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중요하다고 느끼는 가치를 안정된 형식으로 붙들기 위해 필요하다. 制度(제도)가 살아 있으려면 먼저 本心(본심)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깊게 남는 대목이다. 사람은 때로 논리보다 먼저 몸으로 반응한다.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부끄러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느끼는 돌봄,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저절로 생기는 무게는 추상적 구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맹자는 그 마음을 억누르지 말고, 올바른 (예)와 (의)로 완성하라고 말한다.


등문공상 5장은 愛無差等(애무차등)의 매력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모든 사람을 아끼려는 마음은 귀하지만, 그것이 부모와 타인을 처음부터 같은 평면에 놓는 순간 사랑의 근본은 흔들린다. 맹자가 말하는 一本(일본)은 배타적 가족주의가 아니라, 관계와 책임이 실제로 시작되는 자리의 확인이다.

한대 훈고 계열 독법은 이 장을 薄葬(박장)과 厚葬(후장), 親親(친친)의 윤리를 가르는 실천 논변으로 읽고, 송대 성리 계열 독법은 본심과 예(禮)의 관계를 밝히는 심성 논변으로 읽는다. 두 흐름은 모두 인간의 사랑이 넓어질 수는 있어도, 그 넓어짐은 부모를 향한 자연스러운 정과 책임을 통과해야 한다는 결론에서 만난다.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보편 존중과 구체 책임을 혼동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가깝다.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마음이 필요하지만, 가까운 관계를 향한 책임의 무게까지 없애 버리면 결국 누구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이 장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는, 공공 윤리와 가족 윤리의 긴장을 피하지 않고 그 순서를 끝까지 묻기 때문이다.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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