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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하으로

맹자 고자하 9장 — 부걸보걸(富桀輔桀) — 지금의 양신(良臣)은 옛 민적(民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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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고자하 9장 부걸보걸(富桀輔桀) 대표 이미지

맹자 고자하 9장은 유능한 신하라는 말이 언제 공허해지고 언제 위험해지는지를 날카롭게 따지는 장이다. 오늘날에는 토지를 넓히고 창고를 채우며 전쟁에서 이기는 신하를 良臣(양신)이라 부르지만, 맹자는 그런 평가를 단호하게 뒤집는다. 임금이 (도)를 향하지 않고 (인)에 뜻을 두지 않은 상태라면, 그런 성과는 나라를 세우는 공이 아니라 백성을 해치는 民賊(민적)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장의 전개는 매우 직선적이다. 1절에서는 땅을 넓히고 재정을 늘려 주는 신하를 두고 그것은 富桀(부걸), 곧 걸왕을 부유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2절에서는 외교와 군사로 전쟁 승리를 보장하는 신하를 두고 그것은 輔桀(보걸), 곧 걸왕을 돕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3절에서는 지금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풍속을 바꾸지 않으면, 설령 천하를 얻더라도 하루아침도 지킬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정치의 기준을 바깥 성과에서 안쪽 도리로 되돌리는 말로 읽는다. 토지와 창고와 군사 승리가 그 자체로는 선악을 결정하지 못하며, 군주가 이미 도를 잃은 상태라면 그런 능력은 오히려 폭정의 수명을 늘리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民賊(민적)은 직접 약탈하는 자만이 아니라, 백성을 해치는 정권을 더 강하게 만드는 자까지 가리킨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여기서 의와 이익의 갈림길을 더 분명히 본다. 군주가 인을 향하지 않는데도 부강과 승리만을 도와주는 신하는 겉으로는 충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군주의 욕망을 확장하고 백성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은 단순한 반전쟁론이 아니라, 성과와 윤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정치철학으로 읽힌다.

오늘의 감각으로 읽어도 이 장은 매우 직접적이다. 실적을 올리고 시장을 넓히고 자원을 확보하는 능력은 쉽게 칭송되지만, 그 힘이 어떤 가치에 봉사하는지는 자주 묻지 않는다. 맹자는 바로 그 지점을 찌른다. 방향이 잘못된 권력에 유능함을 바치는 것은, 무능보다 더 큰 해악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1절 — 맹자왈금지사군자(孟子曰今之事君者) — 도를 향하지 않는 군주를 부유하게 하는 일

원문

孟子曰今之事君者曰我能爲君하여辟土地하며充府庫라하나니今之所謂良臣이오古之所謂民賊也라君不鄕道하여不志於仁이어든而求富之하니是는富桀也니라

국역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오늘날 임금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나는 임금을 위해 토지를 개간하고 나라의 창고를 가득 채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들은, 오늘날에는 이른바 좋은 신하지만, 옛날에는 이른바 백성을 해치는 도적이었다. 임금이 도를 지향하지도 않고 인에 뜻을 두고 있지도 않은데, 그런 임금을 부유하게 해 주려 하니, 이는 걸왕을 부유하게 해 주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당시 현실 정치의 통념을 뒤집는 말로 읽는다. 보통은 국고를 채우고 땅을 넓히는 자를 충신이라 여겼지만, 맹자는 군주가 도를 잃었을 때 그런 능력이 누구를 위한 것이 되는가를 먼저 묻는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富桀(부걸)은 단지 고대 폭군을 비유한 말이 아니라, 도를 잃은 권력에 부를 집중시키는 모든 정치를 겨누는 규정으로 이해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不鄕道(불향도)와 不志於仁(불지어인)에 더 무게를 둔다. 방향이 이미 어긋난 군주에게 부와 자원을 더해 주는 일은, 그 힘을 선에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욕과 폭정을 확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는 경제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이 봉사하는 도덕적 방향으로 읽힌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매출을 늘리고 자산을 키우는 능력이 언제나 좋은 리더십의 증거는 아니다. 조직의 방향이 이미 잘못되어 있고 사람을 해치는 방식으로 굴러가는데도 숫자만 좋게 만드는 참모는, 사실 조직을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맹자는 성과가 아니라 그 성과가 누구를 위해 쓰이는지를 먼저 보라고 말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비슷하다. 잘못된 목적에 더 많은 자원과 힘을 보태는 일은 겉보기에 유능해 보여도 결국 해를 키우는 일일 수 있다. 내가 돕는 사람이나 일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묻지 않으면, 노력과 능력은 얼마든지 해로운 편에 설 수 있다.

2절 — 아능위군약여국(我能爲君約與國) — 도를 향하지 않는 군주를 위해 강한 전쟁을 하는 일

원문

我能爲君하여約與國하여戰必克이라하나니今之所謂良臣이오古之所謂民賊也라君不鄕道하여不志於仁이어든而求爲之强戰하니是는輔桀也니라

국역

그리고 ‘나는 임금을 위해 동맹국과 제휴하여 전쟁을 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들은, 오늘날에는 이른바 좋은 신하지만, 옛날에는 이른바 백성을 해치는 도적이었다. 임금이 도를 지향하지도 않고 인에 뜻을 두고 있지도 않은데, 그런 임금을 위해 강전해 주려 하니, 이는 걸왕을 도와주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군사적 유능함의 한계를 지적하는 말로 읽는다. 외교와 전쟁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군주가 인과 도를 잃은 상태라면, 그 승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승리가 아니라 해를 확대하는 승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輔桀(보걸)은 폭군의 오른팔이 되는 일이며, 전쟁을 잘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승리의 윤리를 더 엄격히 본다. 이길 수 있다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이기려 하는가가 먼저 바로 서지 않으면 그 능력은 결국 욕망을 무장시키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戰必克(전필극)을 자랑하는 태도는 유능함의 표지가 아니라,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정치의 증상으로 읽힌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경쟁에서 반드시 이기게 해 주겠다는 약속도 방향이 잘못되면 위험하다. 조직의 가치와 방식은 무너졌는데 경쟁 승리만 보장하는 전략가는 단기적으로는 영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큰 파괴를 가능하게 하는 사람일 수 있다. 맹자는 전쟁에서 이기는 힘보다 그 힘이 어떤 정당성을 갖는지 먼저 묻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무엇이든 이기고 성취하게 해 주는 기술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잘못된 분노나 과도한 욕심을 이루게 돕는 일은 충성이 아니라 동조일 수 있다. 輔桀(보걸)이라는 말은, 누군가를 돕는다는 명분이 언제 해악의 공범이 되는지를 날카롭게 보여 준다.

3절 — 유금지도(由今之道) — 지금의 길과 풍속을 바꾸지 않으면 천하도 지키지 못한다

원문

由今之道하여無變今之俗이면雖與之天下라도不能一朝居也니라

국역

오늘날의 방식을 따르기만 하고 오늘날의 풍속을 바꾸지 않으면, 비록 천하를 준다 해도 하루아침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마지막 절을 앞선 두 절의 총결로 읽는다. 지금의 통속적 방식, 곧 부강과 정복만을 중시하는 정치 방식으로는 설령 천하를 얻어도 오래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今之俗(금지속)은 단순한 생활 풍속이 아니라, 정치를 성과와 힘으로만 재는 시대 전체의 습속을 뜻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여기서 변화의 핵심을 마음과 풍속의 교정으로 읽는다. 제도와 힘을 먼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도를 향하는 방향과 인을 지향하는 풍속이 바뀌어야 천하도 비로소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절은 왕도 정치의 요약이면서, 성과주의 정치에 대한 근본 비판으로 읽힌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오래 가지 못하는 조직은 대개 성과를 냈는데도 풍속을 바꾸지 못한 조직이다. 숫자는 올랐지만 사람을 대하는 방식, 권력을 쓰는 방식, 내부의 기준이 그대로라면 그 성과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맹자의 말은 전략 변경보다 문화와 풍속의 변화가 더 근본적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짚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일시적인 성공은 얻을 수 있어도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나를 움직이는 습관과 풍속이 그대로라면, 큰 기회를 손에 넣어도 곧 다시 놓치기 쉽다. 無變今之俗(무변금지속)은 그래서 바깥 성취보다 안쪽 삶의 방식이 더 중요하다는 경고로 읽힌다.


맹자 고자하 9장은 유능한 신하의 기준을 근본부터 뒤집는다. 땅을 넓히고 창고를 채우며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는 능력은, 군주가 도와 인을 잃은 상태라면 오히려 걸왕을 부유하게 하고 걸왕을 돕는 일에 불과하다. 그래서 맹자는 오늘의 良臣(양신)을 곧바로 옛날의 民賊(민적)으로 돌려세운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장에서 정치 성과의 도덕적 기준을 읽고, 송대 성리학은 성과와 의의 분리를 더 강하게 비판한다. 두 흐름은 결국 같은 결론으로 모인다. 방향이 잘못된 권력에 유능함을 바치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가담이며, 풍속과 도리를 바꾸지 못한 성취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현실에서도 富桀輔桀(부걸보걸)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경고다. 성과를 만드는 능력은 강력하지만, 그 힘이 어디를 향하느냐를 묻지 않으면 유능함은 얼마든지 해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맹자는 그래서 실적보다 방향, 승리보다 도리, 확장보다 풍속의 변화를 먼저 보라고 말한다.

등장 인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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