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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으로

논어 위정 17장 — 지지위지(知之爲知) — 아는 것을 안다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된 앎이다 — 자기 인식과 지적 정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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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위정 17장 지지위지(知之爲知) 대표 이미지

논어(論語) 위정 17장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가장 유명한 문장 가운데 하나로 압축한 장이다. 공자는 자로(由)에게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 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앎이라고 정리한다. 짧지만, 이 장은 지식의 양보다 지식에 대한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정확히 찌른다.

이 장의 핵심 사자성어인 知之爲知(지지위지)는 흔히 정직함의 문제로만 읽히지만, 사실 그보다 더 깊다. 자신이 아는 것의 범위와 모르는 것의 한계를 분별하는 능력, 곧 자기 인식의 정확성이야말로 참된 앎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지식을 과장하는 사람보다, 무지를 정확히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을 더 지혜롭게 본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이 장을 배움의 성실함과 언행의 바름을 가르치는 말로 읽는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태도는 배움의 문을 열어 두는 자세이며, 함부로 안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독법은 是知也(시지야)를 지식의 정직성으로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程子) 어록의 맥락은 이를 더욱 수양론적으로 읽는다. 사람은 스스로의 무지를 분명히 인정할 때 비로소 배움의 자리를 지킬 수 있고,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마음은 닫히게 된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해석에서 이 장은 단지 공부법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성실함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오늘의 시선으로 읽어도 이 장은 여전히 강력하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일수록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기 쉬워지고, 자신감이 실력처럼 포장되기 쉽다. 공자는 오히려 가장 기초적인 정직함, 곧 내가 어디까지 알고 어디서부터 모르는지를 분명히 아는 태도가 진짜 지성이라고 말한다.

1절 — 자왈유아회여지지호(子曰由아誨女知之乎) —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원문

子曰由아誨女知之乎인저知之爲知之오

국역

공자께서 자로에게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고 하시며, 먼저 아는 것은 안다고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이 첫 절을 배움의 태도를 바로잡는 선언으로 읽는다. 공자는 자로에게 새로운 지식 내용을 주기보다, 지식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부터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분명히 하는 일은 배움의 기초이자, 언행의 신뢰를 세우는 출발점이 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자기 인식의 성실함으로 읽는다. 진짜 공부는 많이 아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정확히 밝히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해석은 知之(지지)의 반복 속에서 자기 점검의 중요성을 본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좋은 의사결정의 출발이 현재 알고 있는 사실을 정확히 구분하는 데 있음을 보여 준다. 조직이 흔들릴 때는 종종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해서 판단이 왜곡된다. 공자의 말은 데이터와 해석, 확실한 것과 추정인 것을 분명히 가르라는 원칙으로도 읽힌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사람은 아는 것을 명확히 정리하지 않으면 생각이 쉽게 흐려진다. 막연히 안다고 느끼는 것과 실제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공자는 먼저 그 차이를 분명히 하라고 한다.

2절 —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 —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다

원문

不知爲不知是知也니라

국역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분명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앎이라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이 절을 배움의 문을 닫지 않는 태도로 읽는다.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은 더 배울 수 있지만, 무지를 숨기는 사람은 거기서 멈춘다는 것이다. 따라서 不知爲不知(불지위불지)는 단지 겸손의 미덕이 아니라 배움을 지속하게 하는 실제적 조건이 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구절을 성실(誠實)의 문제로 읽는다.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분명히 할 때, 비로소 앎은 허망한 자만심이 아니라 진실한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독법에서 是知也(시지야)는 지성의 내용보다 그 근본 태도를 가리킨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전문가성과 신뢰의 핵심을 건드린다. 진짜 실력자는 모르는 것을 숨기지 않고, 확인이 필요한 것을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대로 모든 것을 아는 척하는 문화는 조직을 더 취약하게 만든다. 공자의 말은 전문성의 첫 조건이 솔직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말은 자존심보다 사실을 앞세우게 만든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不知爲不知(불지위불지)는 결국 자신을 낮추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정확히 알라는 말이다.


논어 위정 17장은 앎의 본질을 아주 간단한 두 문장으로 정리한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공자는 참된 지식이란 더 많은 정보를 쌓는 일 이전에, 자기 인식과 지적 정직함을 확보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장은 공부법인 동시에 인격의 문제를 함께 다룬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를 배움의 성실함과 언행의 바름으로 읽고, 송대 성리학은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성실과 수양의 문제로 더 깊게 해석한다. 두 독법은 모두,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가 오히려 진짜 앎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만난다. 그래서 知之爲知(지지위지)와 不知爲不知(불지위불지)는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배움과 판단의 가장 기초적인 윤리로 읽혀야 한다.

오늘의 삶에서도 이 장은 여전히 날카롭다. 많이 말하는 시대일수록, 진짜 지성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남는다. 공자는 바로 그 용기와 정직함을 앎이라고 불렀다.

등장 인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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