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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으로

논어 자한 17장 — 호덕호색(好德好色) — 덕을 좋아함이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는 만큼 간절한 사람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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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자한 17장 호덕호색(好德好色) 대표 이미지

논어 자한 17장은 매우 짧지만 공자의 인간 이해가 얼마나 냉정하고 정확한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공자는 사람들이 (덕)을 좋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색), 곧 눈앞의 매혹과 감각적 욕망을 좇는 열정만큼 덕을 사랑하는 사람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고 탄식한다.

이 문장이 강한 이유는 덕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덕이 좋다는 사실을 안다. 문제는 앎의 수준이 아니라 좋아함의 강도다. 공자는 바로 그 지점을 찌른다. 덕을 좋다고 여기는 것과, 실제로 아름다운 외모나 즉각적 쾌락을 좇듯이 덕을 간절히 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장을 인간의 기호와 심리 경향을 드러내는 탄식으로 읽는다. 반면 송대 성리학은 여기서 수양의 진짜 난점을 본다.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더 강하게 좋아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 전체가 정해지므로, 好德(호덕)은 단순한 도덕 지식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로 이해된다.

자한편의 흐름 안에서도 이 장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자한편이 공자의 기준, 수양, 시대 진단을 함께 보여 주는 편이라면, 17장은 그 기준이 왜 현실에서 잘 구현되지 않는지를 간명하게 설명한다. 사람은 옳은 것을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그것을 가장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1절 — 자왈오미견호덕(子曰吾未見好德) — 덕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은 드물다

원문

子曰吾未見好德이如好色者也케라

국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외모를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경학 계열 독법은 이 문장을 인간의 기호가 어디로 먼저 쏠리는지를 드러낸 말로 본다. 사람은 본성상 눈에 보이고 즉각적인 즐거움에 쉽게 끌리지만, (덕)은 그렇게 곧장 마음을 사로잡기 어렵기 때문에 공자가 이 차이를 지적했다는 것이다. 손석 계열의 의리 해석 역시 이 탄식을 단순한 도덕 비난이라기보다, 현실 인간의 통상적 경향을 짚는 진단으로 읽는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구절을 수양론의 핵심 문제로 옮겨 읽는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마땅히 덕을 좋아해야 하지만, 사욕과 감각적 기호가 앞서면 그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好德(호덕)은 덕을 안다는 수준을 넘어, 욕망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마음이 스스로 선을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공부의 문제로 이해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많은 사람이 가치와 원칙을 말하지만 실제 판단은 더 즉각적인 보상, 평판, 편의에 끌릴 때가 많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의 탄식은 조직이 표어를 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구성원들이 정말 무엇을 더 강하게 원하게 설계돼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덕을 중시한다고 말하는 문화와 덕을 실제로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문화는 다르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문장은 불편할 만큼 솔직하다. 우리는 옳은 것을 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더 자극적이고 더 즉각적인 것을 먼저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好德好色(호덕호색)의 대비는 자신이 무엇을 칭찬하는가보다, 무엇에 더 빨리 끌리고 무엇을 위해 더 쉽게 시간을 쓰는가를 돌아보게 만든다.


논어 자한 17장은 덕과 욕망의 경쟁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구절이다. 공자는 덕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덕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사랑의 강도에서는 감각적 대상에 훨씬 더 쉽게 끌린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한대 훈고는 이를 인간 심리의 현실 진단으로 읽고, 송대 성리학은 욕망의 방향을 바로잡는 수양의 문제로 더 깊게 읽는다. 두 해석을 함께 보면 이 장은 도덕 교훈을 넘어서,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가장 사랑할 때 삶의 질서가 달라지는지를 묻는 문장이 된다.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가치관은 선언보다 선호에서 드러난다. 무엇이 더 좋아 보이고, 무엇을 위해 더 빨리 움직이며, 무엇을 위해 더 큰 비용을 기꺼이 치르는가가 그 사람의 진짜 중심을 말해 준다. 공자의 탄식이 오래 남는 이유는 바로 그 점이 지금도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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