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이루하 23장은 짧은 문장 하나로 사람의 처신을 가르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겉으로 보기에는 받아도 괜찮고, 주어도 괜찮고, 심지어 죽어도 장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맹자는 바로 그 “겉보기에는 가능해 보이는 일”이야말로 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허용 가능성과 마땅함은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장의 핵심은 可以取(가이취)와 可以無取(가이무취), 可以與(가이여)와 可以無與(가이무여), 可以死(가이사)와 可以無死(가이무사)의 대비에 있다. 어떤 행동이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닌 상황이 있다. 맹자는 바로 그 중간 지대에서 사람이 쉽게 자기 욕심과 체면을 끼워 넣는다고 본다. 그래서 취함은 廉(렴)을 상하고, 베풂은 惠(혜)를 상하며, 죽음은 勇(용)을 상할 수 있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대목을 세 가지 덕목의 남용을 경계하는 말로 읽는다. 청렴, 은혜, 용기는 모두 귀한 덕목이지만, 상황의 경중과 마땅함을 헤아리지 못한 채 형식처럼 실행하면 오히려 그 이름을 해친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傷廉傷惠(상렴상혜)는 덕목이 덕목답게 쓰이기 위해서는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함을 드러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여기서 마음의 공정한 판별을 더 강조한다. 사람은 받으면서도 청렴하다고 믿고, 주면서도 인심을 베푼다고 여기며, 물러나지 않으면서도 용감하다고 스스로 칭찬하기 쉽다. 그러나 맹자의 기준은 자기평가가 아니라 義(의)다. 정말 취해야 할 때 취하고, 정말 주어야 할 때 주고, 정말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이지, 그 반대면 덕목의 이름만 남고 내용은 무너진다.
그래서 이 장은 이루하의 여러 짧은 장들 가운데서도 특히 분별의 윤리를 압축해서 보여 준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금하는 수준을 넘어서, 해도 되는 일 가운데서도 하지 않는 편이 더 옳은 순간을 가려 내는 능력이다. 맹자는 바로 그 섬세한 판단이 있어야 덕이 모양이 아니라 실제가 된다고 본다.
1절 — 맹자왈가이취(孟子曰可以取) — 가능한 것과 마땅한 것을 구별하라
원문
孟子曰可以取며可以無取에取면傷廉이오可以與며可以無與에與면傷惠오可以死며可以無死에死면傷勇이니라
국역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얼핏 보면 取해도 되지만 자세히 보면 취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취하면 청렴이 손상되고, 얼핏 보면 주어도 되지만 자세히 보면 주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주면 은혜를 베푸는 뜻을 잃게 되며, 얼핏 보면 죽어도 되지만 자세히 보면 죽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죽으면 진정한 용기를 해치는 것이다.”
축자 풀이
可以取(가이취)는 받아도 될 수 있는 상황을 뜻하고,可以無取(가이무취)는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뜻한다.傷廉(상렴)은 청렴을 해친다는 뜻으로, 받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받으면廉(렴)의 뜻이 무너짐을 가리킨다.可以與(가이여)와可以無與(가이무여)는 주어도 되고 주지 않아도 되는 경계를 가리키며, 베풂에도 분별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傷惠(상혜)는 은혜를 해친다는 뜻으로, 주는 행위 자체보다 왜 주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을 담는다.可以死(가이사)와可以無死(가이무사),傷勇(상용)은 죽음을 택하는 일조차 마땅함을 잃으면 참된 용기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구절을 덕목의 형식적 실행을 경계하는 말로 본다. 廉(렴)과 惠(혜)와 勇(용)은 모두 칭찬받는 가치이지만, 각각 취함과 베풂과 죽음이라는 행위가 언제나 그 덕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리는 자리에서 성급히 행동하면, 덕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덕의 이름을 상하게 한 것으로 읽는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義(의)에 따른 마음공부의 문제로 읽는다. 청렴해 보이고, 후해 보이고, 용감해 보이는 행위는 자기만족과 명예욕에 쉽게 기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는 행위의 외형보다 그 행위가 정말 마땅한가를 먼저 묻는다. 이 독법에서 傷廉傷惠(상렴상혜)와 傷勇(상용)은 덕목이 과잉이나 오판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할 수 있다”와 “해야 한다”를 구별하지 못할 때 생기는 문제를 정면으로 짚는다. 받을 수 있는 이익을 다 받는다고 청렴한 조직이 되는 것은 아니고, 줄 수 있는 혜택을 다 푼다고 좋은 리더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희생적 결단조차 필요 이상의 과시가 되면 공동체를 위한 용기가 아니라 판단 실패가 된다. 좋은 리더는 행동의 가능성보다 그 행동의 정당성을 먼저 따진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구절은 날카롭다. 받을 수 있다고 다 받으면 마음이 흐려지고, 줄 수 있다고 다 주면 오히려 관계를 왜곡할 수 있으며, 버틸 수 있다고 무조건 자신을 몰아붙이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자기 소모가 될 수 있다. 맹자는 덕을 크게 보이게 만드는 행위보다, 지금 멈추는 것이 더 옳은가를 살피는 분별을 더 높게 본다.
맹자 이루하 23장은 허용과 정당함 사이의 간격을 정확히 가리킨다.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취하면 廉(렴)을 잃고, 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베풀면 惠(혜)를 잃고, 죽을 수 있다는 결기만으로 죽음을 택하면 勇(용)을 잃는다. 맹자는 덕을 드러내는 행동보다, 그 행동이 정말 마땅한가를 끝까지 따지는 분별을 앞세운다.
한대 훈고 계열 독법은 덕목의 남용을 경계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송대 성리 계열 독법은 자기 마음속 욕심과 명분의 착각을 경계하는 쪽으로 더 나아간다. 두 흐름은 모두, 덕이란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맞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서 만난다. 그래서 傷廉傷惠(상렴상혜)는 절제가 소극성이 아니라 덕의 본질을 지키는 적극적 판단임을 보여 준다.
등장 인물
- 맹자: 전국시대 유가의 대표 사상가. 이 장에서 취함과 베풂과 죽음조차
義(의)에 맞지 않으면 각각廉(렴)·惠(혜)·勇(용)을 해칠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