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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상으로

맹자 고자상 3장 — 생지위성(生之謂性) — 고자의 명제에 맹자가 반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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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고자상 3장 생지위성(生之謂性) 대표 이미지

맹자 고자상 3장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두고 맹자와 고자(告子(고자))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대목이다. 고자는 生之謂性(생지위성), 곧 살아 있는 작용 자체를 성(性)이라 부른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단정하고 간명한 정의 같지만, 맹자는 바로 이 명제가 너무 넓고 평평해서 인간 본성의 차별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이 장의 묘미는 맹자가 긴 이론 설명보다 짧은 반문을 연쇄적으로 던진다는 데 있다. 먼저 흰 것을 희다고 하는 비유를 받아들이는지 묻고, 그 다음 흰 깃털과 흰 눈과 흰 옥의 흼이 모두 같은가를 확인한다. 마지막에는 곧장 犬之性(견지성), 牛之性(우지성), 人之性(인지성)이 모두 같다는 말이 되느냐고 밀어붙인다. 짧은 문답이지만 인간 본성론의 핵심 쟁점이 아주 날카롭게 드러난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고자의 성 개념이 지나치게 포괄적임을 드러내는 논변으로 읽는다. (생)을 그대로 (성)이라 하면 지각과 운동을 지닌 모든 생물이 같은 차원에서 묶이게 되고, 그 결과 인간 본성의 도덕적 특수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맹자의 반문은 고자의 정의가 낳는 귀결을 스스로 드러내게 만드는 논리적 추궁으로 이해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성의 본래 선함을 지키기 위한 첫 방어선으로 읽는다. 만약 본성을 단순한 생명 작용으로 환원하면 인간 안에 있는 인의예지의 단서도 동물적 생존 기능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독법에서 生之謂性(생지위성)은 본성의 두께를 얇게 만드는 명제이고, 맹자의 반문은 그 얇아짐을 막아 세우는 철학적 응수다.

고자상의 흐름 속에서 이 장은 맹자의 성선설이 단지 따뜻한 인간관이 아니라, 매우 세밀한 개념 구분 위에 서 있음을 보여 준다. 아래 세 절은 고자의 간명한 정의, 맹자의 첫 반문,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본성 구별을 묻는 최종 반문을 차례로 따라가며, 왜 인간 본성을 단순한 생존 작용으로 환원할 수 없는지를 드러낸다.

1절 — 고자왈생지위성(告子曰生之謂性) — 고자의 간명한 정의

원문

告子曰生之謂性이니라

국역

고자가 말하였다. 살아 있는 작용, 곧 생명체가 지니는 생존 본능과 지각 운동 같은 것을 바로 본성이라고 부른다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첫 절을 고자의 입장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낸 문장으로 본다. 여기서 (생)은 단순히 숨 쉬는 생물학적 생존만이 아니라, 보고 듣고 움직이는 모든 생명 작용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읽힌다. 이런 독법에서는 바로 그 넓음 때문에 고자의 정의가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기준을 충분히 세우지 못한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성을 기질적 생명 현상으로 낮추어 파악하는 입장으로 읽는다. 성을 단지 (생)과 같은 층위에 두면, 인간 안의 도덕적 단서가 본래적 규범성을 잃고 자연적 욕구의 일부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고자의 정의는 간명하지만, 바로 그 간명함 때문에 중요한 차이를 지워 버리는 말로 평가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첫 절은 인간을 너무 단순한 기능으로 정의할 때 생기는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을 생존 욕구와 반응 체계로만 보면, 책임감이나 양심, 수치심 같은 더 높은 차원의 동기들은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맹자가 곧바로 반문에 들어가는 이유도, 인간을 너무 평평하게 정의하면 실제 인간 행동의 중요한 층위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사람을 본능적 존재로만 설명하려 한다. 먹고 살고 반응하는 것이 인간의 전부라고 여기면, 왜 어떤 사람은 손해를 감수하고도 옳은 일을 하려 하는지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 절은 인간 이해를 어디까지 낮출 것인가 하는 오래된 질문의 출발점이다.

2절 — 맹자왈생지위성야(孟子曰生之謂性也) — 흰 것의 비유로 밀어붙이다

원문

孟子曰生之謂性也는猶白之謂白與아曰然하다白羽之白也猶白雪之白이며白雪之白이猶白玉之白與아曰然하다

국역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살아 있는 작용을 본성이라 하는 것이, 마치 흰 것을 희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인가. 고자가 그렇다고 답하자, 맹자는 다시 흰 깃털의 흰색이 흰 눈의 흰색과 같고, 흰 눈의 흰색이 흰 옥의 흰색과도 같으냐고 묻고, 고자는 그렇다고 답한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고자의 정의를 비유 위에 올려 놓고 시험하는 단계로 본다. 흰 깃털, 흰 눈, 흰 옥은 대상은 달라도 (백)이라는 속성 하나로 묶일 수 있는데, 만약 고자의 生之謂性(생지위성)도 이런 식의 규정이라면 성 역시 대상 간 본질 차이를 설명하지 못하는 표면적 공통성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독법에서 맹자의 질문은 아직 직접 반박이 아니라, 상대가 받아들인 원리를 끝까지 밀어 보는 준비 단계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개념 혼동을 드러내는 치밀한 논증으로 읽는다. 흰색은 단지 외형적 공통 속성이라서 여러 대상에 똑같이 붙을 수 있지만, 성은 그렇게 단순한 외형 속성이 아니라 존재의 본래 결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맹자의 비유는 성을 색깔 같은 일반 표지로 취급하는 고자의 오류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너무 넓은 분류가 오히려 판단을 흐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여러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나 욕구만 묶어 놓고 그것을 인간 본성이라고 부르면, 실제로 중요한 차이들은 분석에서 빠져 버린다. 맹자의 질문은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곧 본질이 같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던진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비슷하다. 겉으로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동기와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울고, 화내고, 욕망한다는 공통점만으로 사람을 설명하면, 그 안에 담긴 양심이나 수치, 책임감 같은 차이는 지워진다. 이 절은 공통 속성과 본질을 섞어 말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읽힌다.

3절 — 연즉견지성(然則犬之性) — 개와 소와 사람의 본성이 같은가

원문

然則犬之性이猶牛之性이며牛之性이猶人之性與아

국역

맹자께서 마지막으로 반문하셨다. 그렇다면 개의 본성이 소의 본성과 같고, 소의 본성이 사람의 본성과도 같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니냐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마지막 절을 고자의 명제를 궁지로 몰아넣는 결정적 반문으로 본다. (생)이라는 공통 기준만으로 성을 규정하면, 결국 개와 소와 인간의 성도 같은 범주로 묶일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인간 본성의 독특함은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독법에서 맹자의 반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고자의 정의가 인간 윤리의 토대를 세우기에는 너무 얕다는 점을 드러내는 결론이 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절을 성선설의 전제를 방어하는 핵심 대목으로 읽는다. 인간의 성이 동물의 성과 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면, 인의예지의 단서와 도덕적 수양의 근거도 함께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 독법에서 犬性(견성), 牛性(우성), 人性(인성)의 대비는 인간 본성의 규범적 차원을 끝까지 지키려는 맹자의 철학적 선택을 보여 준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사람을 관리 가능한 본능 집합으로만 볼 때 생기는 위험을 드러낸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전제하면 교육, 책임, 도덕, 성장 같은 말도 얇아질 수밖에 없다. 맹자는 인간을 단지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자신을 세우고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고 밀어붙인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반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에게 욕구와 충동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그 욕구의 집합으로만 정의할 수는 없다. 개와 소와 사람의 본성이 다 같은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 안의 도덕적 가능성을 끝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맹자 고자상 3장은 짧지만 매우 단단한 논변이다. 고자는 본성을 생명 작용으로 정의하고, 맹자는 그 정의를 비유와 반문으로 따라가며 결국 인간 본성의 특수성이 사라진다는 점을 드러낸다. 흰 깃털과 흰 눈과 흰 옥의 비유는 공통 속성과 본질을 구분하게 만들고, 마지막의 犬之性(견지성)과 人之性(인지성)의 대비는 인간 본성론의 핵심을 선명하게 밀어 올린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장에서 고자의 정의가 지나치게 넓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읽고, 송대 성리학은 그것이 인의예지의 근거를 흐리는 문제라고 읽는다. 두 독법은 모두 生之謂性(생지위성)이라는 말이 간단해 보일수록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난다. 본성을 너무 쉽게 정의하면, 인간이 왜 도덕을 말할 수 있는 존재인지도 함께 흐려지기 때문이다.

오늘의 독자에게도 이 장은 낯설지 않다. 인간을 본능과 생존 전략으로만 설명하는 언어는 지금도 매우 강력하다. 그러나 맹자의 반문은 그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이지만,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生之謂性(생지위성)을 둘러싼 이 짧은 논쟁은 바로 그 점을 끝까지 따져 묻는다.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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