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2글자 이상 입력하세요
만장하으로

맹자 만장하 3장 — 우기덕야(友其德也) — 벗은 집안이 아니라 덕을 보고 사귄다

36 min 읽기
맹자 만장하 3장 우기덕야(友其德也) 대표 이미지

맹자 만장하 3장은 벗을 사귄다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길게 묻는 장이다. 첫머리의 友其德也(우기덕야), 곧 벗함이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라는 말은 이 장 전체를 꿰는 핵심 문장이다. 나이, 부귀, 형제 관계 같은 바깥 조건을 끼고 사귀는 순간 벗은 벗이 아니라 利害關係(이해관계)의 연장이 되고 만다는 것이 맹자의 판단이다.

이 장의 전개는 단순한 우정론에 그치지 않는다. 맹자는 먼저 벗의 원칙을 말한 뒤, 맹헌자(孟獻子), 비혜공(費惠公), 진평공(晉平公), 요(堯)와 순(舜)의 사례를 차례로 끌어와 신분과 지위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참된 벗됨과 존현(尊賢)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 준다. 결국 마지막 절에서 貴貴(귀귀)와 尊賢(존현)이 같은 도리라고 결론짓는 구조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교유의 기준과 존현의 예를 단계적으로 밝히는 문답으로 읽는다. 특히 不挾長(불협장), 不挾貴(불협귀), 不挾兄弟(불협형제)의 세 부정은 벗의 관계에 외적 권세를 끼워 넣지 말라는 금지 규정으로 이해된다. 이런 독법에서 사례들은 모두 덕을 기준으로 사람을 대할 때 신분 질서가 어떻게 새롭게 조정되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장을 덕을 중심으로 한 관계 윤리의 정식화로 읽는다. 벗은 도를 함께 닦는 사이이므로 나이와 지위는 그 관계의 근거가 될 수 없고, 군주가 현자를 존중하는 일도 같은 원리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友其德也(우기덕야)는 단지 친구를 잘 사귀라는 조언이 아니라, 인간 관계 전체를 덕의 질서로 다시 세우는 기준이 된다.

만장하의 흐름 속에서 이 장은 스승, 벗, 군신의 경계를 섬세하게 나누면서도 그 바탕에 하나의 공통 원리가 있음을 밝힌다. 아래 여섯 절은 벗의 정의에서 시작해 역사적 사례들을 지나 마지막 원리 선언에 이르기까지, 관계의 중심이 권세가 아니라 덕이어야 한다는 맹자의 생각을 차근차근 전개한다.

1절 — 만장문왈감문우(萬章問曰敢問友) — 벗은 덕을 벗하는 사이

원문

萬章이問曰敢問友하노이다孟子曰不挾長하며不挾貴하며不挾兄弟而友니友也者는友其德也니不可以有挾也니라

국역

만장이 벗 사귀는 도리에 대해 묻자, 맹자는 나이를 내세우지 말고, 부귀를 내세우지 말고, 형제나 친족 관계를 내세우지 말고 벗해야 한다고 답한다. 벗이란 서로의 덕을 벗하는 관계이니, 무엇이든 기대거나 앞세우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벗의 정의를 정면에서 세운 대목으로 본다. (협)은 단순히 가진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관계의 힘으로 삼는다는 뜻이므로, 세 가지 부정은 외적 조건을 우정의 우위 근거로 삼지 말라는 엄한 기준으로 읽힌다. 이런 독법에서 友其德也(우기덕야)는 벗의 대상이 사람의 껍질이 아니라 그 사람의 덕성이라는 점을 못박는 선언이 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도를 함께 닦는 朋友(붕우)의 본질로 읽는다. 벗은 상하 관계도 아니고 이해관계의 교환도 아니므로, 덕이 아니면 서로를 붙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不可以有挾也(불가이유협야)는 단지 예의 바른 태도가 아니라, 도학적 공동 수양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의 전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네트워킹과 우정의 차이를 분명히 가른다. 직급, 배경, 인맥을 앞세운 관계는 당장은 편리할 수 있어도 서로를 바로잡고 성장시키는 벗의 관계가 되기 어렵다. 맹자는 진짜 동료 관계라면 결국 실력과 품성, 곧 (덕)을 기준으로 서야 한다고 본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비슷한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 힘이 되는 사람을 먼저 찾는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조건이 바뀌면 금세 흔들린다. 友其德也(우기덕야)는 함께 있고 나면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가를 먼저 묻는 말이며, 그래서 오늘에도 여전히 까다롭고 정확한 우정의 기준이다.

2절 — 맹헌자백승지가(孟獻子百乘之家) — 집안을 의식하지 않는 벗

원문

孟獻子는百乘之家也라有友五人焉하더니樂正裘와牧仲이오其三人則予忘之矣로라獻子之與此五人者로友也에無獻子之家者也니此五人者亦有獻子之家면則不與之友矣리라

국역

맹헌자(孟獻子)는 백승(百乘)의 대부 집안 사람이었는데 벗 다섯이 있었다. 악정구(樂正裘)와 목중(牧仲),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의 이름은 맹자가 잊었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이 다섯 사람이 맹헌자의 집안 배경을 의식하지 않고 벗했다는 데 있다. 만약 그들이 맹헌자의 집안을 의식했다면 맹헌자 또한 그들과 벗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첫 절의 원칙을 현실 사례로 증명하는 장면으로 본다. 맹헌자는 스스로 집안의 권세를 앞세우지 않았고, 그의 벗들 또한 그 권세를 기대지 않았기 때문에 벗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독법은 無獻子之家(무헌자지가)라는 표현을, 집안이라는 외적 조건이 관계에 끼어들지 않은 상태로 해석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덕을 기준으로 한 평등한 교유의 본보기로 읽는다. 가문이 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벗이 되려면, 둘 다 그 배경을 관계의 기준에서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맹헌자의 사례는 권세 있는 사람이 겸손해야 할 뿐 아니라, 상대도 그 권세를 좇지 않아야 참된 벗이 성립함을 보여 준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권한 있는 사람 주변에 왜 진짜 친구가 드문지를 설명해 준다. 상대가 직책이나 배경 때문에 가까이 온다면 그 관계는 이미 비대칭적이고, 솔직한 피드백도 기대하기 어렵다. 맹헌자의 사례는 권세를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을 둘러싼 관계에서 무엇이 덕 때문이고 무엇이 배경 때문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가족 배경이나 경제적 형편, 사회적 평판이 관계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주변 조건을 보고 다가가면, 오래 가는 벗이 되기 어렵다. 이 절은 좋은 벗이란 상대의 집안이 아니라 상대의 사람됨을 기억하는 사람임을 말해 준다.

3절 — 비유백승지가(非惟百乘之家) — 작은 나라 임금도 마찬가지다

원문

非惟百乘之家爲然也라雖小國之君이라도亦有之하니費惠公이曰吾於子思則師之矣오吾於顔般則友之矣오王順長息則事我者也라하니라

국역

이 원리는 백승의 대부 집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작은 나라의 임금에게도 있었다. 비혜공(費惠公)은 자사(子思)는 스승으로 모시고, 안반(顔般)은 벗으로 대하며, 왕순(王順)과 장식(長息)은 자신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구분해 말하였다. 곧 임금이라 해도 모든 관계를 한 가지 방식으로 묶지 않았다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관계의 종류를 엄밀히 구분하는 사례로 읽는다. 군주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스승으로, 어떤 이는 벗으로, 어떤 이는 신하로 대했다는 것이다. 이런 독법에서 비혜공의 말은 덕이 앞설 때 군주의 자리도 스스로 조정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명분과 덕의 조화를 설명하는 예로 읽는다. 스승, 벗, 섬기는 자의 관계를 섞지 않는 것은 질서를 위한 일이지만, 그 기준을 신분이 아니라 덕과 역할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비혜공은 군주이면서도 덕 있는 사람 앞에서는 스스로 위치를 낮출 줄 아는 인물로 해석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한 사람이 모든 관계에서 같은 권위를 행사하려고 할 때 생기는 문제를 짚는다. 대표나 관리자라 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배워야 하고, 어떤 사람과는 동료로 협력해야 하며,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로 지시를 내릴 수 있다. 이 구분이 흐려지면 조직은 배움도 잃고 우정도 잃고 명령만 남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한 역할에 자신을 과도하게 고정한다. 부모, 선배, 관리자, 연장자라는 위치가 모든 관계에서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절은 사람마다 맺어야 할 관계의 종류가 다르며, 그것을 아는 감각이 곧 성숙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4절 — 비유소국지군(非惟小國之君) — 예우만으로는 존현이 아니다

원문

非惟小國之君이爲然也라雖大國之君이라도亦有之하니晉平公之於亥唐也에入云則入하며坐云則坐하며食云則食하여雖疏食菜羹이라도未嘗不飽하니蓋不敢不飽也라然이나終於此而已矣오弗與共天位也하며弗與治天職也하며弗與食天祿也하니士之尊賢者也라非王公之尊賢也니라

국역

이 원리는 큰 나라의 임금에게도 있었다. 진평공(晉平公)은 해당(亥唐) 앞에서 들어오라면 들어가고, 앉으라면 앉고, 먹으라면 먹었다.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배불리 먹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감히 그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났을 뿐, 그와 지위를 함께 나누지도 않았고, 직책을 함께 맡기지도 않았으며, 녹을 함께 먹지도 않았다. 이는 한 선비로서 현자를 공경한 것이지, 왕공(王公)으로서 현자를 제대로 존중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겉예우와 실존중의 차이를 가르는 대목으로 본다. 진평공은 행동으로는 현자를 높이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지위와 직책과 녹을 함께하지 않았으므로 군주의 차원에서 현자를 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독법은 尊賢(존현)이 단순한 공손한 태도나 접대가 아니라, 실제 국정 참여의 자리까지 열어 주는 것을 포함한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형식적 공경과 실질적 신임의 차이로 읽는다. 현자를 존중한다면 그 말과 덕이 정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진평공은 개인적으로는 공손했어도 공적으로는 자신과 권한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해당을 향한 예우는 미덕이지만, 아직 참된 尊賢(존현)에는 이르지 못한 반쪽짜리 존중으로 해석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전문가를 예우만 하고 실제 결정에는 참여시키지 않는 조직 문화를 정확히 비춘다. 회의에 초대하고 존댓말을 쓰고 의견을 묻더라도, 정작 권한과 책임을 전혀 나누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 존중이 아니다. 맹자는 존중의 진위를 결국 권한 구조에서 판별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비슷하다. 누군가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삶의 중요한 선택에서는 그 사람의 말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면, 그 존경은 안전한 거리에서만 유지되는 감상에 가깝다. 이 절은 마음의 호의와 실제 신뢰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보여 준다.

5절 — 순상견제(舜尙見帝) — 천자도 필부와 벗할 수 있다

원문

舜이尙見帝어시늘帝館甥于貳室하시고亦饗舜하사迭爲賓主하시니是는天子而友匹夫也니라

국역

순이 올라가 요 임금을 뵈었을 때, 요는 사위인 순을 별실에 머물게 하고 또 순을 대접하였으며, 서로 번갈아 손님과 주인이 되었다. 이는 천자가 평민 신분의 사람과도 벗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앞선 사례들의 정점으로 읽는다. 작은 나라의 군주, 큰 나라의 군주를 넘어 마침내 천자까지도 덕이 있는 필부와 벗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요와 순의 사례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독법에서 迭爲賓主(질위빈주)는 외교적 형식이 아니라, 덕 앞에서 서로를 높이는 교유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덕이 신분을 넘어서는 관계 원리의 완성으로 읽는다. 천자와 필부라는 차등은 정치적 질서 안에 남아 있지만, 도를 같이하는 자리에서는 서로 벗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요와 순의 만남은 군주가 현자를 단지 불러 쓰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교유하고 배울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모범 사례가 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덕과 역량 앞에서는 진심으로 동료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직급 차이가 크더라도 서로가 배움과 존중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면 조직은 살아 움직인다. 반대로 최고 권력이 끝내 모든 관계를 위아래로만 처리하면, 현자와도 벗할 수 없고 결국 배움의 통로가 막힌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장면은 인상적이다. 사회적 차이나 나이 차, 경력 차가 크더라도 사람이 덕으로 만나면 뜻밖의 우정이 가능하다. 迭爲賓主(질위빈주)는 번갈아 주인이 되고 손님이 된다는 말인데, 좋은 관계란 결국 어느 한쪽만 늘 베풀거나 늘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리를 바꾸어 존중할 수 있는 상태임을 보여 준다.

6절 — 용하경상(用下敬上) — 귀귀와 존현은 같은 도리다

원문

用下敬上을謂之貴貴오用上敬下를謂之尊賢이니貴貴尊賢이其義一也니라

국역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을 귀인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공경하는 것을 현자를 존중한다고 한다. 귀한 이를 귀하게 대하는 일과 현자를 존중하는 일은 결국 그 뜻과 도리가 하나라는 말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마지막 절을 장 전체의 총결로 본다. 貴貴(귀귀)는 위계를 바로 세우는 공경이고, 尊賢(존현)은 덕을 바로 세우는 공경이지만, 둘 다 마땅한 대상을 마땅하게 대하는 한 가지 의리라는 것이다. 이런 독법은 앞선 모든 사례가 결국 이 한 줄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증거였다고 읽는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절을 명분과 덕의 조화로 읽는다. 위를 공경하는 일은 질서를 지키는 것이고, 아래에 있는 현자를 공경하는 일은 덕을 높이는 것이니, 둘은 서로 충돌하는 원리가 아니라 같은 천리의 두 방향이라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其義一也(기의일야)는 상하 질서와 존현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위계 존중과 전문성 존중을 대립항으로 보지 말라고 말한다. 상사를 공경하는 것과 실력 있는 실무자를 존중하는 것은 서로 다른 정치가 아니라 같은 건강한 조직 문화의 두 모습이다. 위로만 공손하고 아래의 현자를 무시하면 조직은 굳고, 반대로 위계를 전부 무시하면 협업 질서가 무너진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예의와 실력 존중을 따로 생각한다. 그러나 맹자는 윗사람을 공경하는 예와 아랫사람의 덕을 존중하는 예가 같은 도리라고 본다. 결국 사람을 마땅한 이유로 마땅하게 대하는 일, 그것이 貴貴(귀귀)와 尊賢(존현)을 하나로 묶는 핵심이다.


맹자 만장하 3장은 벗 사귐의 기준에서 시작해, 군주와 현자의 관계, 천자와 필부의 교유, 그리고 위계와 존현의 원리까지 한 줄로 꿰어 낸다. 벗은 덕을 벗하는 것이며, 그래서 나이와 부귀와 친족을 끼고 사귀어서는 안 된다는 첫 절의 말은 뒤의 모든 사례를 이끄는 기준이 된다. 맹헌자의 교유도, 비혜공의 구분도, 진평공에 대한 비판도, 요와 순의 사례도 모두 이 기준 위에서 이해된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장을 관계의 외적 조건과 내적 기준을 분별하는 문답으로 읽고, 송대 성리학은 덕을 중심으로 관계 질서를 다시 세우는 공부론으로 읽는다. 두 독법은 모두 友其德也(우기덕야)가 단지 친구를 잘 고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기준 자체를 덕으로 돌려 세우는 선언이라는 점에서 만난다. 마지막의 貴貴尊賢 其義一也(귀귀존현 기의일야)는 그래서 장 전체의 가장 단정한 결론이다.

오늘의 독자에게도 이 장은 그대로 날카롭다.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나이, 지위, 배경, 효용을 너무 쉽게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함께 성장하기보다 서로를 계산하게 만들기 쉽다. 友其德也(우기덕야)는 사람의 조건이 아니라 사람의 덕을 보고 사귀라는 요청이며, 그 요청은 우정뿐 아니라 스승과 동료, 리더와 전문가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등장 인물

참조


이전 글

맹자 고자상 3장 — 생지위성(生之謂性) — 고자의 명제에 맹자가 반문하다

다음 글

맹자 만장상 3장 — 봉상유비(封象有庳) — 순이 동생 상(象)을 유비(有庳)에 봉한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