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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상으로

맹자 고자상 10장 — 사생취의(捨生取義) — 삶도 의(義)도 함께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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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고자상 10장 사생취의(捨生取義) 대표 이미지

고자상 10장은 捨生取義(사생취의)라는 가장 널리 알려진 맹자의 명제를 중심으로, 인간이 무엇을 끝내 버릴 수 없고 또 무엇 때문에 삶조차 포기할 수 있는지를 단계적으로 밀고 나가는 장이다. 흔히 이 구절은 비장한 결단의 표어처럼 소비되지만, 본문 전체를 읽으면 단순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있는 도덕 감각을 해명하는 논증임을 알 수 있다.

첫 절에서 맹자는 (어)와 熊掌(웅장)의 비유로 선택의 구조를 제시하고, 이어 삶보다 더 중한 것이 있고 죽음보다 더 미워할 것이 있음을 논리적으로 펼쳐 간다. 그 뒤에는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나 현자는 그것을 잃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一簞食一豆羹(일단사일두갱)과 萬鍾(만종)의 사례를 통해 본심이 실제 욕망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드러낸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장을 (의)의 가치를 삶의 보존보다 높게 두는 명백한 교훈으로 읽는다. 반면 송대 성리학은 여기서 本心(본심), 곧 사람 안에 이미 있는 수오지심과 도덕의 단서를 더 강하게 본다. 전자가 행위 규범의 우선순위를 밝힌다면, 후자는 그 규범이 인간 마음의 바탕에서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설명한다.

고자상의 문맥에서도 이 장은 중심부에 놓인다. 앞선 논의들이 인간 본성과 의리의 관계를 다룬다면, 이 장은 그 논의를 극한 상황까지 밀어붙여 실제 선택의 언어로 바꾼다. 그래서 捨生取義(사생취의)는 죽음을 찬양하는 말이 아니라, 생존보다 더 깊은 차원의 인간다움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묻는 말이다.

1절 — 맹자왈어(孟子曰魚) — 삶과 의가 함께 얻어지지 않을 때

원문

孟子曰魚도我所欲也며熊掌도亦我所欲也언마는二者를不可得兼인댄舍魚而取熊掌者也로리라生亦我所欲也며義亦我所欲也언마는二者를不可得兼인댄舍生而取義者也로리라

국역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생선 요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발바닥 요리도 내가 원하는 요리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생선 요리를 포기하고 곰발바닥 요리를 택할 것이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義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삶을 포기하고 의를 택할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첫 절을 비유를 통해 (의)의 존귀함을 밝힌 규정으로 읽는다. (어)와 熊掌(웅장)은 모두 좋은 것이지만, 더 귀한 것이 있을 때 덜 귀한 것을 버리는 일은 자연스럽다. 같은 구조로 (생)과 (의)를 놓으면, 의는 삶보다 상위의 가치라는 점이 드러난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절을 의리의 외적 강요가 아니라 마음의 참된 선호가 드러나는 장면으로 읽는다. 사람은 본래 생을 원하지만, 그보다 더 중한 도리가 있기에 극한의 경우 생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서 捨生取義(사생취의)는 비범한 영웅 몇 사람의 일이 아니라 인간 본심의 구조를 드러내는 말이 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는 성과와 원칙이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의 문제로 읽을 수 있다. 눈앞의 생존과 이익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을 위해 공동체의 기준을 버리면 결국 조직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맹자는 첫 절부터 어떤 선택은 손익 계산이 아니라 가치의 위계를 묻는 문제라고 말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모두를 가질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관계를 지키려면 편의를 포기해야 하고, 양심을 지키려면 당장의 안전이나 이익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捨生取義(사생취의)는 그런 순간에 무엇이 더 사람다운 선택인가를 묻는 말이다.

2절 — 생역아소욕(生亦我所欲) — 삶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다

원문

生亦我所欲이언마는所欲이有甚於生者라故로不爲苟得也하며死亦我所惡언마는所惡有甚於死者라故로患有所不辟也니라

국역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원하는 것 중에는 삶보다 더 큰 것이 있기 때문에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싫어하는 것 중에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죽음의 환난도 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와 손석 계열 독법은 苟得(구득)과 不辟患(불피환)을 통해 의로운 사람의 태도를 드러낸다고 본다. 삶을 구하고 화를 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의를 잃는 삶이나 수치를 동반한 회피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절은 단순히 죽음을 무릅쓴다는 말이 아니라, 구차함을 경계하는 말로 읽힌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와 정자 계열은 여기서 수오지심의 작동을 본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죽음보다 더 싫어해야 할 부정과 불의가 있기 때문에 몸을 아끼는 마음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不爲苟得(불위구득)과 有所不辟(유소불피)는 도덕 감각이 생존 본능을 넘어서는 순간을 설명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위기 속에서 무엇이 구차한 연명인지 구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내부 비리를 덮거나 책임을 전가해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선택은 겉으로는 생존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본체를 무너뜨린다. 苟得(구득)을 경계하라는 말은 그래서 조직 윤리에도 직접 연결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단지 살아남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은 아니다. 부끄러움을 무디게 하고 원칙을 조금씩 내주는 습관이 쌓이면, 사람은 결국 자신이 왜 그 삶을 지키려 했는지조차 잊게 된다. 맹자는 삶을 사랑하면서도 삶보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3절 — 여사인지소욕(如使人之所欲) — 만일 삶이 최고라면 왜 모든 수단을 쓰지 않는가

원문

如使人之所欲이莫甚於生이면則凡可以得生者를何不用也며使人之所惡莫甚於死者면則凡可以辟患者를何不爲也리오

국역

가령 사람이 원하는 것 중에 삶보다 더 큰 것이 없다면 살 수 있는 방법을 어찌 다 쓰지 않겠으며, 가령 사람이 싫어하는 것 중에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어찌 다 쓰지 않겠는가.”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은 이 대목을 앞 절의 논리를 더 분명히 하는 반문으로 읽는다. 만약 생존이 절대 기준이라면, 사람은 수단의 옳고 그름을 따질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나 실제 인간은 그렇게 살지 않으므로, 이미 그 안에 생존보다 상위의 기준이 있음을 역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는 이 절을 인간 마음에 대한 실증적 질문으로 본다. 누구나 극한에서는 몸을 보전하려 하지만, 동시에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차마 하지 못함이 곧 (의)의 자취이며, 인간 본심이 단지 욕망의 집합이 아님을 보여 준다고 읽는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관점에서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이 왜 위험한지 보여 준다. 정말로 생존만이 기준이라면 조작, 은폐, 희생양 만들기 같은 수단도 모두 허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동체는 실제로 그런 결론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미 더 높은 기준을 전제하고 있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돈, 안전, 체면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는 없다는 감각이 우리를 사람답게 붙든다. 맹자의 반문은 바로 그 숨겨진 기준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4절 — 유시즉생(由是則生) — 살 수 있어도 하지 않는 일이 있다

원문

由是라則生而有不用也하며由是라則可以辟患而有不爲也니라

국역

이렇기 때문에 살 수 있는데도 그 방법을 쓰지 않는 경우가 있고, 이렇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는데도 그 방법을 쓰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이 절은 의를 위한 금지의 실례를 예고하는 문장으로 읽힌다. 인간은 단순히 가능하다고 해서 다 행하지 않으며, 그 중지의 기준이 바로 禮義(예의)라는 것이다. 생존에 도움 되는 수단이어도 의에 어긋나면 버릴 수 있다는 점이 앞 절의 반문을 결론으로 묶는다.

송대 성리학에서는 不用(불용)과 不爲(불위)를 마음의 자제력으로 읽는다. 사람의 본심은 욕망이 나아가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부당한 수단 앞에서 스스로 멈출 수 있다. 이 멈춤이야말로 도덕적 자율성의 실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현대적 해석·함의

조직에서는 “할 수 있다”와 “해도 된다”를 구분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규정상 가능하거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도 공동체의 신뢰를 해치는 방식이라면 하지 않는 판단이 필요하다. 맹자는 그 차이가 선택의 기술이 아니라 본심의 보존에서 나온다고 본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비슷하다. 쉽게 이익을 얻는 편법이나 관계를 망가뜨리는 한마디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하지 않는 선택이 사람을 만든다. 不用(불용)과 不爲(불위)는 무능이 아니라 절제다.

5절 — 시고소욕(是故所欲) — 이런 마음은 현자만의 것이 아니다

원문

是故로所欲이有甚於生者하며所惡有甚於死者하니非獨賢者有是心也라人皆有之언마는賢者는能勿喪耳니라

국역

결국 원하는 것 중에는 삶보다 더 큰 것이 있으며, 싫어하는 것 중에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 있다는 말인데, 賢者(현자)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현자는 다만 이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절을 성인과 범인의 차이를 절대적 본질 차이로 보지 않는 근거로 읽는다. 의를 귀히 여기고 수치를 아는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으며, 문제는 그것을 길러 내고 보존하느냐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화 가능성도 여기서 나온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와 정자 계열은 本心(본심)의 보존이라는 주제를 이 대목에서 뚜렷하게 읽는다. 사람의 본성 안에는 이미 선한 단서가 있으며, 현자는 새로운 마음을 추가로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은 곧 다음 절 이하에서 왜 상실의 문제가 중요해지는지를 설명해 준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윤리를 몇몇 탁월한 인물만의 자질로 보면 지속 가능한 문화를 만들기 어렵다. 오히려 구성원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수치심과 공정감이 있다는 전제 위에서 제도와 교육을 설계해야 한다. 맹자의 말은 윤리의 출발점을 엘리트성보다 보편성에 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스스로를 “원래 약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맹자는 누구나 이미 그 마음을 갖고 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없던 덕을 새로 장식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삶을 정돈하는 일이다.

6절 — 일단사일두갱(一簞食一豆羹) — 모욕을 담은 음식은 받지 않는다

원문

一簞食와一豆羹을得之則生하고弗得則死라도嘑爾而與之면行道之人도弗受하며蹴爾而與之면乞人도不屑也니라

국역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얻어 먹으면 살고 얻어 먹지 못하면 죽는 상황에서도, 욕을 하면서 음식을 주면 길 가는 사람도 받지 않으며, 발로 차서 주면 구걸하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이 절은 인간이 극한의 궁핍 속에서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염치를 보여 주는 사례로 읽힌다. 行道之人(행도지인)이나 乞人(걸인)까지도 모욕을 담아 준 음식은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와 수치심이 결코 상층 지식인만의 미덕이 아님이 드러난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는 이 장면을 是心(시심)의 생생한 발현으로 읽는다. 굶주림이라는 강한 욕망 앞에서도 차마 받을 수 없게 만드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본심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一簞食一豆羹(일단사일두갱)의 사례는 추상 논증을 일상의 감각으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

현대적 해석·함의

조직의 관점에서는 보상 자체보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돈이나 기회가 있더라도 인격을 짓밟는 방식으로 주어진다면, 공동체는 결국 신뢰를 잃는다. 맹자는 인간이 빵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정확히 알고 있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더라도 자존을 완전히 짓밟는 형태라면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 절은 그런 감각을 허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안에 남아 있는 본심의 흔적으로 본다.

7절 — 만종즉불변(萬鍾則不辨) — 큰 녹봉 앞에서는 왜 예의를 분별하지 않는가

원문

萬鍾則不辨禮義而受之하나니萬鍾이於我何加焉이리오爲宮室之美와妻妾之奉과所識窮乏者得我與인저

국역

그런데 萬鍾(만종)의 祿(녹)은 예의염치를 따지지 않고 받으니, 그 만종의 녹이 내 자신에게 무슨 보탬이 된단 말인가. 만종의 녹을 받는 것은 다만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妻妾(처첩)을 먹여 살리고 내가 알고 있는 궁핍한 사람들이 나를 고맙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은 앞 절의 빈곤 사례와 이 절의 부귀 사례를 대조해 읽는다. 굶주릴 때조차 모욕을 담은 음식은 받지 않던 사람이, 큰 녹봉 앞에서는 禮義(예의)를 가리지 않고 받는다면 이미 가치 판단이 뒤집힌 것이다. 萬鍾(만종)은 단순한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는 장치로 이해된다.

송대 성리학에서는 이 절을 욕망이 본심을 가리는 방식의 분석으로 읽는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 아니라 장식과 향락, 체면과 영향력 같은 부차적 욕망 때문에 (의)를 놓치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도 모르게 자기 마음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於我何加焉(어아하가언)은 양적 증가가 인간의 존엄을 정말 더해 주는가를 묻는 반문이 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작은 모욕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큰 보상 앞에서는 원칙을 쉽게 접는 이중 기준을 경계하게 한다. 높은 연봉, 지위, 영향력, 네트워크 같은 것이 윤리적 분별을 마비시키기 시작하면 공동체는 안에서부터 썩는다. 萬鍾(만종)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현실적인 시험이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처음에는 차마 못 하던 일이 더 큰 보상 앞에서는 정당화되기 쉽다.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과시와 편안함, 주변의 인정 욕구 때문에 양심을 조금씩 양도하는 순간이 문제다. 맹자는 바로 그 자기기만을 찌른다.

8절 — 향위신(鄕爲身) — 본래 죽어도 받지 않던 것을 이제는 받는다

원문

鄕爲身엔死而不受라가今爲宮室之美하여爲之하며鄕爲身엔死而不受라가今爲妻妾之奉하여爲之하며鄕爲身엔死而不受라가今爲所識窮乏者得我而爲之하나니是亦不可以已乎아此之謂失其本心이니라

국역

앞서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받으며, 앞서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 처첩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받으며, 앞서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 내가 알고 있는 궁핍한 사람들이 나를 고맙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는 받으니, 이 역시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인가. 이를 두고 그 본심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와 손석 계열 독법은 이 마지막 절을 전후 모순의 폭로로 읽는다. 생존만을 위해서도 받지 않던 것을 사치와 가족 봉양, 인정 욕구 때문에 받게 되었다면, 이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적 기준이 무너진 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失其本心(실기본심)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마음의 근본을 놓친 상태를 가리킨다.

송대 성리학에서는 이 절이 장 전체의 결론이다. 사람 안에는 본래 (의를) 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으나, 욕망과 습관이 쌓이면서 그 마음이 흐려진다. 따라서 수양의 핵심은 없던 선을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本心(본심)을 되찾고 보존하는 데 있다고 읽는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처음 창업기나 위기 국면에서 지키던 원칙을, 규모가 커진 뒤 편의와 장식 때문에 스스로 무너뜨리는 장면이 흔하다. 초기에 “죽어도 안 한다”고 하던 일을 이제는 체면과 보상, 대외 평판을 위해 한다면,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본심의 상실에 있다. 맹자의 마지막 질문은 그래서 조직이 자기 정체성을 잃는 순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본심을 잃는 일은 대개 거창한 타락보다 작은 합리화에서 시작된다.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못 하던 일을 이제는 가족 때문이라고, 관계 때문이라고, 선의 때문이라고 포장하며 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失其本心(실기본심)은 남의 평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원래 무엇을 차마 하지 못했는지를 기억해 내는 말이다.


고자상 10장은 捨生取義(사생취의)라는 단호한 명제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인간 마음의 구조를 섬세하게 추적하는 장이다. 삶과 의의 선택에서 출발해, 구차한 생존을 경계하고, 누구나 의를 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녔음을 밝힌 뒤, 마지막에는 욕망이 그 마음을 어떻게 흐리게 하는지까지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장의 핵심은 죽음을 미화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사람답게 붙드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한대 훈고는 여기서 의의 우선성과 염치의 질서를 읽고, 송대 성리학은 본심의 보존과 상실이라는 내면의 문제를 읽는다. 두 흐름은 모두, 인간은 단지 생존 본능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의)를 향한 마음이 이미 그 안에 있다는 점에서 만난다.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이 장은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원칙을 양보하는가. 정말 살아남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더 화려한 집, 더 편한 관계, 더 많은 인정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가. 맹자의 답은 분명하다. 사람이 끝내 지켜야 할 것은 생명 그 자체만이 아니라, 생명을 사람답게 만드는 本心(본심)이다.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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