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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상으로

맹자 고자상 16장 — 천작인작(天爵人爵) — 천작(天爵)을 닦으면 인작(人爵)이 따라오고, 천작으로 인작을 요구하면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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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고자상 16장 천작인작(天爵人爵) 대표 이미지

맹자 고자상 16장은 인간이 추구하는 두 종류의 권위를 단호하게 갈라 놓는다. 하나는 하늘이 준 작위, 곧 仁義忠信(인의충신)과 樂善不倦(낙선불권) 같은 덕의 품격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주는 작위, 곧 公卿大夫(공경대부) 같은 제도적 지위다. 맹자는 이 둘을 대비시키며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따라오는 것인지를 분명히 말한다.

이 장이 날카로운 이유는 단순히 덕이 벼슬보다 낫다고 훈계하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天爵(천작)을 닦았고 人爵(인작)은 그 뒤를 따라왔다고 말한 뒤, 지금 사람들은 거꾸로 天爵(천작)을 수단으로 삼아 人爵(인작)을 요구한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그 지위를 얻고 나면 정작 덕을 버리고, 결국 벼슬마저 잃는다고 경고한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본말의 질서를 바로잡는 문장으로 읽는다. 仁義忠信(인의충신)은 하늘이 부여한 마땅함이며, 公卿大夫(공경대부)는 정치 질서 안에서 사람이 부여하는 명위이므로, 앞의 것을 닦아 뒤의 것이 따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조를 더 내면화해 읽는다. 天爵(천작)은 외부 포상이 아니라 마음 안의 덕성이며, 그것을 잃는 순간 人爵(인작)을 쥐고 있어도 이미 자기 자신을 잃은 셈이라는 것이다.

고자상의 여러 장이 본성과 마음의 근원을 다루었다면, 16장은 그 논의를 정치적 욕망과 사회적 지위의 문제까지 연결한다. 결국 도덕은 철학적 논쟁에만 머물지 않고, 사람이 무엇을 위해 자신을 닦는가를 통해 드러난다. 아래 세 절은 그 문제를 가장 간명하게 정리한다.

1절 — 맹자왈유천작자(孟子曰有天爵者) — 하늘이 주는 작위와 사람이 주는 작위

원문

孟子曰有天爵者하며有人爵者하니仁義忠信樂善不倦은此天爵也오公卿大夫는此人爵也니라

국역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주는 관작이 있고 사람이 주는 관작이 있다. 仁義(인의), 忠信(충신)과 (선)을 즐겨 행하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하늘이 주는 관작이고, 公卿(공경)과 大夫(대부)는 사람이 주는 관작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작위의 성격을 둘로 나누는 정의문으로 읽는다. 天爵(천작)은 하늘이 사람에게 마땅히 부여한 도덕의 자격이고, 人爵(인작)은 시대와 제도가 부여하는 사회적 자리라는 것이다. 이 독법은 맹자가 두 작위를 병렬로 두면서도, 앞의 것이 본이고 뒤의 것은 말이라는 위계를 분명히 세운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天爵(천작)을 더욱 내면적인 개념으로 읽는다. 하늘이 준다는 말은 하늘 밖 어딘가에서 관직처럼 수여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 안에 이미 주어진 도덕적 가능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樂善不倦(낙선불권)은 그 가능성을 실제 삶 속에서 계속 닦아 가는 공부의 모습을 뜻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직함과 직위는 人爵(인작)에 가깝고, 신뢰와 성실, 공정함은 天爵(천작)에 가깝다. 앞의 것은 임명장으로 얻을 수 있지만, 뒤의 것은 오랜 태도와 선택으로만 쌓인다. 맹자는 조직에서 어떤 사람이 진짜 높은가를 묻는 기준 자체를 다시 세운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사람들은 종종 이력서와 타이틀을 자신의 가치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 절은 타인이 붙여 주는 이름과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분리해 보게 만든다. 밖에서 받은 칭호보다 안에서 닦아 온 덕이 더 근본이라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불편할 만큼 정확하다.

2절 — 고지인은수기천작(古之人은修其天爵) — 옛사람은 천작을 닦고 인작은 따라오게 했다

원문

古之人은修其天爵而人爵從之러니라

국역

옛날 사람들은 하늘이 준 관작을 닦았는데, 그렇게 하면 사람이 주는 관작이 저절로 따라왔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본말 관계의 이상적 순서를 보여 주는 말로 읽는다. 선인은 먼저 자기 안의 덕을 닦았고, 그 결과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지위를 맡겼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從之(종지)는 인작이 천작의 열매이지 목표가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절을 수양과 감응의 질서로 읽는다. 마음의 덕이 충실하면 명예와 지위는 구하지 않아도 따라오게 마련이고, 설령 따라오지 않더라도 천작 자체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독법은 특히 군자가 덕을 닦는 이유를 외적 성공과 분리해 이해하려 한다.

현대적 해석·함의

조직에서는 실력과 인품을 먼저 쌓은 사람이 결국 더 큰 책임을 맡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오래 가는 리더십은 대개 직함을 먼저 좇은 사람이 아니라 기준과 실력을 먼저 세운 사람에게서 나온다. 맹자는 그 순서를 뒤집지 말라고 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럽다. 다만 이 절은 인정 자체를 목표로 삼는 순간 기준이 흔들릴 수 있음을 경고한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타이틀도 무게를 갖는다는 말은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3절 — 금지인은수기천작(今之人은修其天爵) — 지금 사람들은 천작으로 인작을 요구한다

원문

今之人은修其天爵하여以要人爵하고旣得人爵而棄其天爵하나니則惑之甚者也라終亦必亡而已矣니라

국역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하늘이 준 관작을 닦아서 사람이 주는 관작을 구하려 하고, 사람이 주는 관작을 얻고난 뒤에는 하늘이 준 관작을 버리는데, 이는 매우 미혹된 짓이다. 끝내는 반드시 사람이 준 관작마저 잃게 될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앞 절의 반대 사례로 읽는다. 당대 사람들은 天爵(천작)을 본래의 목적으로 닦지 않고 人爵(인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며, 지위를 얻고 나면 곧 덕을 버리므로 결국 지위까지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 독법은 (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낚아채려는 뜻으로 보아, 욕망의 왜곡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절을 자기기만의 문제로 읽는다. 겉으로는 仁義忠信(인의충신)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명예와 직위를 겨냥하는 순간 이미 천작은 손상되며, 그렇게 얻은 인작도 오래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棄其天爵(기기천작)은 도덕적 몰락이 곧 사회적 몰락의 씨앗이 됨을 뜻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가치와 미션을 내세우며 승진과 평판만을 노리는 태도가 쉽게 드러난다. 처음에는 성실과 공정함을 말하다가 지위를 얻은 뒤에는 그 기준을 버리는 사람은 결국 신뢰를 잃는다. 맹자의 통찰은 덕을 브랜딩 도구처럼 쓰는 태도가 왜 오래가지 못하는지를 정확히 짚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그 목적이 인정과 보상뿐일 때,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 덕은 가장 먼저 버려진다는 점이다. 이 절은 왜 어떤 성공이 오히려 사람을 더 빨리 무너뜨리는지 설명해 준다.


맹자 고자상 16장은 天爵(천작)과 人爵(인작)을 나누어, 인간이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는지 단호하게 말한다. 仁義忠信(인의충신)과 樂善不倦(낙선불권)은 하늘이 준 작위이고, 公卿大夫(공경대부)는 사람이 준 작위다. 옛사람은 앞의 것을 닦았고 뒤의 것은 따라왔지만, 지금 사람은 앞의 것을 수단으로 삼아 뒤의 것을 노리고, 얻은 뒤에는 앞의 것마저 버린다고 맹자는 비판한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장에서 본말의 질서가 뒤집힌 시대의 병을 읽고, 송대 성리학은 이를 마음의 덕을 잃은 자기기만으로 더 깊게 읽는다. 두 흐름은 모두 외적 지위가 내적 덕을 대신할 수 없고, 덕을 이용해 얻은 지위는 끝내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만난다.

오늘 이 장은 성과와 평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은 직함을 위해 품격을 닦는 순간 이미 품격을 잃기 시작할 수 있다. 맹자가 말한 天爵人爵(천작인작)의 구분은, 내가 정말 닦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지금 좇는 것이 결과인지 목적인지 끝없이 묻게 만든다.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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