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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하으로

맹자 고자하 16장 — 불설지교(不屑之教) — 달가워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치는 것도 또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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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고자하 16장 불설지교(不屑之教) 대표 이미지

맹자 고자하 16장은 짧지만, 가르침에 대한 통념을 정면에서 뒤집는 장이다. 보통 가르침이라 하면 말을 많이 하고, 자세히 설명하고, 친절하게 이끌어 주는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맹자는 敎亦多術(교역다술), 곧 가르침에도 여러 방식이 있다고 말한 뒤, 심지어 不屑(불설), 달가워하지 않음이나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써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고 선언한다.

이 문장이 낯선 이유는 가르침을 곧바로 다정함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하는 不屑之敎(불설지교)는 상대를 모욕하거나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때로는 직접 말해 주지 않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거나,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할 태도를 몸으로 보여 주는 방식도 교육이 될 수 있다는 뜻에 가깝다. 즉 가르침의 핵심은 말의 양이 아니라 상대를 변화시키는 방식의 적절함이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가르침의 술수, 곧 지도 방식의 다양성을 말한 것으로 읽는다. 모든 사람을 한 가지 방법으로만 다룰 수 없으므로, 때로는 바로 타이르지 않고 거리감을 두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도 교화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를 더 내면적인 수양의 문맥으로 읽는다. 제대로 된 부끄러움과 경각심은 타인의 긴 설명보다, 스승이 더 이상 상대하지 않는 태도에서 오히려 더 깊게 생길 수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不屑之敎(불설지교)도 여전히 교육이라는 것이다.

고자하의 여러 장이 사람을 움직이는 도리와 언어의 방향을 다뤘다면, 16장은 그것이 교육의 방법론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아주 간명하게 보여 준다. 말하지 않는 태도도 가르침이 될 수 있다는 이 역설은, 교육이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인격의 각성을 겨냥한다는 사실을 선명히 드러낸다.

1절 — 맹자왈교역다술의(孟子曰敎亦多術矣) — 달가워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치는 법

원문

孟子曰敎亦多術矣니予不屑之敎誨也者는是亦敎誨之而已矣니라

국역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침에는 또한 방법이 많다. 내가 그를 달가워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치는 것, 이 역시 그를 가르치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가르침의 방법론을 말한 문장으로 본다. 사람마다 기질과 처지가 다르므로, 늘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고 권면한다고 해서 다 교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不屑之敎(불설지교)는 방치가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자각하게 만드는 간접 교육의 한 형식으로 이해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절을 부끄러움과 각성의 교육으로 읽는다. 어떤 경우에는 길게 타이르는 말보다, 스승이나 어른이 더는 기뻐하지 않고 가벼이 보지 않는 태도를 드러낼 때 상대 마음속에 더 깊은 경계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不屑(불설)은 단순한 냉담이 아니라, 도리에 합당하지 않은 태도를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깨우는 엄정한 자비로 해석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이 절은 피드백이 꼭 많은 말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어떤 상황에서는 자세한 설명보다, 그 행동이나 기준을 더는 용납하지 않는 분명한 태도가 더 큰 메시지가 된다. 기준 없는 친절은 조직을 흐리지만, 기준 있는 거리두기는 오히려 강한 교육이 될 수 있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늘 좋게만 말해 주는 것이 진짜 배려는 아닐 때가 있다. 누군가의 태도가 선을 넘었을 때, 웃어 넘기지 않고 더는 가볍게 상대하지 않는 반응은 그 사람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맹자는 침묵과 거리도 때로는 가장 날카로운 가르침이 된다고 본다.


맹자 고자하 16장은 가르침을 정보 전달이나 친절한 설명으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敎亦多術(교역다술)이라는 말처럼, 교육에는 여러 길이 있고, 그중에는 不屑之敎(불설지교)처럼 달가워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깨닫게 하는 길도 포함된다. 핵심은 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상대를 도리에 다시 서게 하느냐는 데 있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장에서 교육 방식의 다양성을 읽고, 송대 성리학은 부끄러움과 각성의 수양 효과를 더 깊게 읽는다. 두 흐름은 모두 방치와 엄정한 교육을 구분하며, 때로는 단호한 태도가 오히려 참된 교화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오늘 이 장은 좋은 스승, 좋은 리더, 좋은 어른의 역할을 다시 묻게 만든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는 것만이 가르침은 아니다. 무엇을 더는 가볍게 넘기지 않는가, 어디에서 분명히 선을 긋는가 역시 교육의 일부다. 不屑之教(불설지교)는 바로 그 어려운 책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등장 인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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