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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태백 9장 — 민가유지(民可由之) — 백성은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모두가 뜻을 다 알게 하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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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태백 9장 민가유지(民可由之) 대표 이미지

태백(泰伯)편은 큰 덕과 큰 정치, 그리고 군자가 공동체를 대하는 방식을 짧고 강한 문장으로 압축해 놓은 편이다. 그 가운데 9장은 특히 통치와 교화의 관계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구절로 읽혀 왔다. 문장은 짧지만, 백성을 이끈다는 일의 현실과 한계를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핵심 표현으로 자주 줄여 부르는 民可由之(민가유지)는 백성을 어떤 길로 이끌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원문 전체는 可使由之(가사유지)와 不可使知之(불가사지지)를 함께 놓음으로써, 정치가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과 사람이 그 뜻을 완전히 자각하는 방식이 언제나 같지는 않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이 장은 단순한 민중관을 말하는 문장이 아니라, 교화와 제도, 이해와 실천의 간극을 묻는 문장으로 읽힌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대목을 통치의 실제 운용과 교화의 단계 차이에 주목해 읽는 경향이 강하다. 백성은 먼저 삶의 질서 속에서 따르게 되고, 그 뒤에야 점차 뜻을 알게 된다는 식의 현실적 독법이다. 반면 송대 성리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정치가 단순히 복종을 강제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며, 끝내는 사람의 마음과 이치를 밝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읽는다.

그래서 태백 9장은 공자(孔子)의 정치론이 냉혹한 현실주의인지, 아니면 단계적 교화론인지에 관한 오랜 논의를 불러온다. 실제로 이 구절은 권위주의의 문장처럼 오해되기도 했고, 반대로 공동체 운영의 한계를 솔직하게 말한 문장으로 재해석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공자가 말하는 정치가 단순한 지시와 복종의 기술이 아니라, 질서를 세우고 삶을 안정시키는 과정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1절 — 자왈민은가사유지(子曰民은可使由之) —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다 알게 하기는 어렵다

원문

子曰民은可使由之오不可使知之니라

국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은 도리를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원리를 다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하안의 『논어집해』와 황간의 『논어의소』 계열 독법은 이 구절을 정치와 교화의 실제 순서를 말한 문장으로 본다. 공동체를 다스릴 때는 먼저 제도와 풍속, 습관과 예의 틀 안에서 백성이 (유), 곧 따르고 행하게 만드는 일이 앞선다. 이 관점에서 (지)는 통치의 명분을 즉시 모두 설명해 납득시키는 일이 아니라, 오랜 교화와 축적을 통해 뒤따르는 단계다. 그래서 이 독법은 백성을 낮춰 본다기보다, 정치가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말한 것으로 읽는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논어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문장을 정치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읽는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제도와 질서가 필요하지만, 군자의 정치는 끝내 사람들로 하여금 마땅한 이치를 깨닫게 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不可使知之(불가사지지)는 영원히 알게 할 수 없다는 단정이라기보다, 당장의 통치 현장에서 이해와 실천이 늘 동시에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진단에 가깝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이 구절은 모든 구성원이 처음부터 전략의 전모를 깊이 이해해야만 움직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 태도를 경계하게 한다. 실제 조직 운영에서는 우선 공통의 절차와 기준, 반복 가능한 습관을 세워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 먼저일 때가 많다. 다만 여기서 멈추면 조직은 쉽게 복종만 남고 신뢰를 잃는다. 따르게 하는 질서와 이해하게 하는 설명은 순서가 다를 수 있지만, 둘 다 필요하다.

개인과 일상의 차원에서도 이 말은 배움과 수양의 과정을 돌아보게 한다. 사람은 언제나 모든 원리를 완전히 이해한 뒤에야 실천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좋은 습관을 따라 해 보고, 예를 지키고, 몸을 움직이며, 그 뒤에야 왜 그것이 중요한지 더 깊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民可由之(민가유지)라는 문제의식은 결국 사람을 함부로 다루라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 이해를 앞설 수 있다는 인간 성장의 현실을 말해 준다.


태백 9장은 짧지만 정치와 교화의 긴장을 응축해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문장을 통치의 현실적 단계론으로 읽고, 송대 성리학은 그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마음의 밝힘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을 덧붙인다. 두 독법은 서로 배타적이기보다,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언제나 질서와 이해 사이의 간극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에서 만난다.

오늘의 눈으로 읽어도 이 장은 여전히 날카롭다. 설명만으로 조직이 굴러가지도 않고, 절차만으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먼저 따르게 할 수 있는 질서를 만들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왜 그 길을 가야 하는지 함께 알게 하는 것, 바로 그 균형이 可使由之(가사유지)와 不可使知之(불가사지지) 사이에서 오늘의 리더십이 다시 배워야 할 지점이다.

등장 인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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