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하(萬章下) 7장은 현자와 군주가 서로를 만나는 방식에도 엄연한 禮(예)와 義(의)의 기준이 있다는 점을 길게 밝히는 장이다. 만장은 먼저 맹자에게 왜 제후를 만나 보지 않느냐고 묻고, 맹자는 서인이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지 않은 이상 감히 제후를 사적으로 찾아가는 일은 예가 아니라고 답한다. 이 장의 핵심 표현인 非招不往(비초불왕)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관계의 형식과 도리의 문제다.
이어지는 문답은 점점 더 정교해진다. 임금이 부역을 위해 부르는 것과 사적으로 현자를 보고 싶어 불러들이는 것은 왜 다른지, 현인을 스승이나 벗처럼 존중한다면서 실제로는 자기 아래 사람 다루듯 부르면 왜 안 되는지, 또 왜 잘못된 부름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지를 사례와 고사로 설명한다. 결국 맹자는 도리에 맞는 만남과 그렇지 못한 만남을 구분하는 기준을 義路禮門(의로예문)이라는 말로 정리한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군신과 사우, 스승과 제자의 명분을 구분하는 글로 읽는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여기에 더해, 현자를 대하는 군주의 예가 곧 정치의 수준을 드러낸다고 본다. 두 흐름 모두 현인을 쓰고 싶다면 먼저 그를 현인답게 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만장하 전체에서도 이 장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군자와 제후, 관직과 초야, 예와 권도의 문제를 논하는 흐름 속에서, 이 7장은 현자를 불러 쓰는 일마저 사사로운 편의나 권력의 습관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만남의 형식 하나에도 정치의 품격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1절 — 만장이왈감문불견제후(萬章이曰敢問不見諸侯) — 제후를 사적으로 보지 않는 까닭
원문
萬章이曰敢問不見諸侯는何義也잇고孟子曰在國曰市井之臣이오在野曰草莽之臣이라皆謂庶人이니庶人이不傳質爲臣하여는不敢見於諸侯禮也니라
국역
만장은 왜 제후를 만나 보지 않는 것이 의리에 맞는지 묻는다. 맹자는 도성에 있든 들판에 있든 관직을 맡지 않은 사람은 모두 庶人(서인)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이 폐백을 올려 신하가 되지 않은 채 제후를 사적으로 만나러 가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답한다. 현자라고 해서 아무 형식 없이 군주를 찾아가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축자 풀이
不見諸侯(불견제후)는 제후를 사적으로 만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장 전체의 출발 질문이다.市井之臣(시정지신)은 도성 안의 평민을 이르는 표현이다.草莽之臣(초망지신)은 초야에 있는 평민을 가리키며, 관직 바깥의 처지를 뜻한다.庶人(서인)은 벼슬하지 않은 일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不傳質爲臣(불전질위신)은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관계의 공식 성립 여부를 드러낸다.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군신 관계의 명분을 밝히는 기본 규정으로 읽는다. 서인이 제후를 함부로 보는 것은 신하가 아닌 자가 군신의 절차를 건너뛰는 셈이므로 예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독법은 현자일수록 더더욱 형식을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여기서 인간관계의 질서를 읽는다. 성리학적 독법은 예를 외형적 형식으로만 보지 않고, 각자의 자리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는 장치로 이해한다. 따라서 제후와 현자의 만남도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처음부터 어긋난다고 본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도 모든 만남이 그저 편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는 없다. 역할과 책임이 다른 사람을 부를 때는 그에 맞는 절차와 존중이 필요하다. 절차를 무시한 친밀함은 오히려 권력의 일방성을 숨기는 장치가 되기 쉽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관계가 바르려면 시작의 방식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어도 상대를 대하는 형식이 그 사람의 위치와 존엄을 무시하면 관계는 처음부터 비뚤어진다.
2절 — 서인이소지역즉왕역(庶人이召之役則往役) — 부역은 가고 사적 호출은 가지 않는 이유
원문
萬章이曰庶人이召之役則往役하고君이欲見之하여召之則不往見之는何也잇고曰往役은義也오往見은不義也니라
국역
만장은 서인이 부역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가면서도, 임금이 직접 보고 싶다며 부르면 왜 가지 않는지 다시 묻는다. 맹자는 부역을 위해 가는 것은 공적인 직분에 따른 도리이지만, 관직도 아닌 상태에서 군주의 사적 호출에 응해 찾아가는 것은 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같은 부름처럼 보여도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축자 풀이
召之役則往役(소지역즉왕역)은 부역하라고 부르면 가서 일을 한다는 뜻이다.欲見之(욕견지)는 만나 보고 싶어 한다는 뜻으로, 군주의 사적 의사를 드러낸다.往役(왕역)은 공적 의무를 수행하러 가는 일을 뜻한다.往見(왕견)은 사적으로 찾아가 만나는 행위를 가리킨다.不義(불의)는 도리에 맞지 않다는 맹자의 판정이다.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절을 의의(義意)의 분별을 가르치는 대목으로 본다. 겉으로는 둘 다 군주의 부름이지만, 하나는 공적 직역에 해당하고 다른 하나는 명분 없는 개인적 호출이므로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독법은 의가 사태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갈린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송대 성리학은 이 차이를 더욱 미세하게 읽는다. 성리학적 독법에서 往役(왕역)은 자기 자리를 따른 행동이지만, 往見(왕견)은 관계의 본말을 뒤집을 위험이 있다. 따라서 옳음은 단순히 명령에 순종하느냐 여부가 아니라, 그 명령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본다.
현대적 해석·함의
조직에서도 상사의 지시라고 해서 모두 같은 종류는 아니다. 직무 범위 안의 공식 요청과, 지위를 이용한 사적 호출은 분명히 다르다. 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조직은 쉽게 사적인 권력 행사에 물든다.
개인에게도 이 절은 유용하다. 누군가의 요구를 거절할 때 무례해 보일까 걱정되더라도, 그 요구가 정당한 역할 관계 안에 있는지 먼저 판단해야 한다. 맹자는 바로 그 구분을 義(의)의 문제로 본다.
3절 — 차군지욕견지야(且君之欲見之也는) — 현자를 보고 싶다면 부르는 방식부터 달라야 한다
원문
且君之欲見之也는何爲也哉오曰爲其多聞也며爲其賢也니이다曰爲其多聞也則天子도不召師온而況諸侯乎아爲其賢也則吾未聞欲見賢而召之也케라繆公이亟見於子思曰古에千乘之國이以友士하니何如하니잇고子思不悅曰古之人이有言曰事之云乎언정豈曰友之云乎리오하시니子思之不悅也는豈不曰以位則子는君也오我는臣也니何敢與君友也며以德則子는事我者也니奚可以與我友리오千乘之君이求與之友而不可得也온而況可召與아
국역
맹자는 임금이 현자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되묻고, 많이 들었기 때문이거나 현명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답을 끌어낸다. 그러고는 많이 들은 사람이라면 천자도 스승을 함부로 불러들이지 않는데 하물며 제후가 그럴 수 없고, 현자라면 더더욱 소환하듯 불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어 노목공이 자사를 자주 찾아가며 선비와 벗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자사가 그것은 벗함이 아니라 섬김의 문제라고 불쾌해한 고사를 들어, 군주가 현자를 벗이라 부르며 낮추어 부를 수조차 없는데 하물며 함부로 호출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고 설명한다.
축자 풀이
爲其多聞也 爲其賢也(위기다문야 위기현야)는 많이 들었거나 현자이기 때문이라는 만장의 답이다.天子 不召師(천자 불소사)는 천자도 스승은 불러들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존중의 극치를 보여 준다.欲見賢而召之(욕견현이소지)는 현자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도리 없이 불러들이는 일을 말한다.以友士(이우사)는 선비와 벗한다고 하는 표현으로, 자사가 문제 삼은 말이다.何敢與君友(하감여군우)는 내가 어찌 감히 임금과 벗할 수 있겠느냐는 말로, 지위 질서를 드러낸다.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절을 군주가 현자를 예로 대해야 한다는 규범의 본론으로 읽는다. 스승과 현자는 그 앎과 덕 때문에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존재이며, 군주의 예는 오히려 더 낮추어 찾아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자사의 불쾌함은 명분을 어지럽히는 말 한마디조차 가볍게 볼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송대 성리학은 여기서 덕과 자리의 이중 질서를 읽는다. 지위로는 군신 관계가 있고, 덕으로는 배워야 할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있다. 성리학적 독법은 이 두 층위를 섞어 “벗”이라 부르거나 함부로 불러들이는 순간, 관계의 본말이 흐려진다고 본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에서도 전문가나 원로를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편의대로 호출하고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진짜 존중은 “함께하자”는 말보다, 상대의 위치와 역할에 맞는 방식으로 찾아가고 듣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누군가를 높이 평가한다면 그만큼 더 조심스러운 형식이 필요하다. 존중의 언어와 실제 태도가 어긋나면, 존중은 쉽게 수사에 그친다.
4절 — 제경공이전할새(齊景公이田할새) — 잘못된 부름은 죽음을 무릅쓰고도 가지 않는다
원문
齊景公이田할새招虞人以旌한대不至어늘將殺之러니志士는不忘在溝壑이오勇士는不忘喪其元이라하시니孔子는奚取焉고取非其招不往也시니라
국역
맹자는 제경공이 사냥을 나갔을 때 원래 공원 관리인을 부르는 방식이 아닌 대부를 부르는 깃발로 虞人(우인)을 불렀으나 그가 오지 않았고, 이에 죽이려 했던 일을 말한다. 공자는 뜻 있는 사람은 도랑과 골짜기에 버려질 죽음도 잊지 않고, 용사는 목숨을 잃을 일도 잊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우인에게서 부름이 바르지 않으면 가지 않는 점을 취했다고 설명한다. 예에 어긋난 부름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축자 풀이
招虞人以旌(초우인이정)은 우인을 대부를 부르는 방식으로 불렀다는 뜻이다.不至(불지)는 오지 않았다는 뜻으로, 잘못된 부름을 거절한 결과를 말한다.志士 不忘在溝壑(지사 불망재구학)은 뜻 있는 사람은 도랑과 골짜기에 버려질 죽음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勇士 不忘喪其元(용사 불망상기원)은 용사는 목숨을 잃는 것도 잊지 않는다는 말이다.非其招不往(비기초불왕)은 자기에게 맞는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장의 핵심 표현이다.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이 절은 예를 위해 죽음까지 무릅쓰는 선례로 읽힌다. 우인은 지위가 낮아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부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공자는 바로 그 점을 옳다고 본다. 그러니 현자가 잘못된 방식으로 부름받고도 가지 않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는 논리다.
송대 성리학은 여기서 예의 객관성을 강조한다. 잘못된 부름을 따르지 않는 것은 감정적 자존심이 아니라, 관계를 바로 세우는 도리라는 것이다. 성리학적 독법은 非其招不往(비기초불왕)을 예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저항으로 본다.
현대적 해석·함의
조직에서도 직급과 역할을 무시한 지시는 종종 “유연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모든 유연함이 좋은 것은 아니다. 잘못된 방식의 호출을 그대로 따르는 순간, 관계의 기준은 무너진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누구나 자기 경계를 지킬 권리가 있다. 부당한 방식으로 불렀을 때 가지 않는 태도는 버릇없음이 아니라, 스스로를 함부로 다루지 않겠다는 선언일 수 있다.
5절 — 왈감문초우인하이(曰敢問招虞人何以) — 사람마다 맞는 부름의 표지가 다르다
원문
曰敢問招虞人何以니잇고曰以皮冠이니庶人은以旃이오士는以旂오大夫는以旌이니라
국역
만장이 그렇다면 우인을 부를 때는 무엇으로 부르느냐고 묻자, 맹자는 皮冠(피관)으로 부른다고 답한다. 그리고 서인은 旃(전)으로, 사는 旂(기)로, 대부는 旌(정)으로 부른다고 덧붙인다. 사람을 부르는 표지와 형식에도 각자의 위치에 맞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는 것이다.
축자 풀이
招虞人何以(초우인하이)는 우인을 무엇으로 부르느냐는 질문이다.以皮冠(이피관)은 피관으로 부른다는 뜻으로, 우인에게 맞는 표지다.庶人 以旃(서인 이전)은 서인은 전으로 부른다는 뜻이다.士 以旂(사 이기)는 사는 기로 부른다는 뜻이다.大夫 以旌(대부 이정)은 대부는 정으로 부른다는 뜻으로, 잘못된 호출의 근거를 설명한다.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절을 예가 막연한 기분이 아니라 구체적 제도와 표지로 구현된다는 점을 밝히는 대목으로 본다. 각 신분과 역할에 맞는 부름의 방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분명하게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대 성리학도 예의 구체성을 중시한다. 마음의 공경이 중요하지만, 그 공경은 반드시 맞는 형식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독법은 형식 없는 진정성이 아니라, 형식과 진정성이 함께 가는 예를 옹호한다.
현대적 해석·함의
오늘날 조직에서도 공식 채널, 호칭, 보고 체계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설계된 형식은 사람을 억누르기보다 오히려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막아 준다.
개인적으로도 관계마다 적절한 방식이 있다. 친하다고 아무 형식이나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중요한 관계일수록 맞는 방식이 더 필요하다.
6절 — 이대부지초로초우인(以大夫之招로招虞人) — 잘못된 형식으로는 현자를 부를 수 없다
원문
以大夫之招로招虞人이어늘虞人이死不敢往하니以士之招로招庶人이면庶人이豈敢往哉리오況乎以不賢人之招로招賢人乎아
국역
맹자는 대부를 부르는 방식으로 우인을 불렀는데도 우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를 부르는 예로 서인을 부르는 것도 옳지 않고, 하물며 현인을 대하는 예가 아닌 방식으로 현자를 부르는 일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름의 형식이 어긋나면 그 만남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다.
축자 풀이
以大夫之招 招虞人(이대부지초 초우인)은 대부의 부름으로 우인을 불렀다는 뜻이다.死不敢往(사불감왕)은 죽음을 무릅쓰고도 감히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以士之招 招庶人(이사지초 초서인)은 사를 부르는 형식으로 서인을 부른다는 말이다.不賢人之招(불현인지초)는 현인을 대하는 방식이 아닌 잘못된 부름을 가리킨다.招賢人(초현인)은 현자를 불러 만나려는 행위를 뜻한다.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절을 비유의 확대 적용으로 읽는다. 우인조차 그릇된 방식으로 부르면 가지 않는데, 현자를 부르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엄중한 예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독법은 잘못된 부름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명분을 해치는 행위라고 본다.
송대 성리학은 여기서 군주의 수양 문제를 본다. 현자를 대하는 방식이 곧 군주의 마음가짐을 드러내며, 현인을 자기 아래 사람처럼 다루는 순간 이미 배울 준비가 안 된 것이라는 것이다. 성리학적 독법은 부름의 형식에서 군주의 도덕 수준을 읽어 낸다.
현대적 해석·함의
조직에서도 유능한 사람을 모셔 오고 싶다면 그에 맞는 절차와 존중이 필요하다. 상대의 역할과 전문성을 무시한 채 편의적으로 부르면, 진짜 실력자는 오지 않거나 와도 오래 남지 않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누군가를 귀하게 여기면서도 함부로 대하면 모순이다. 맹자는 그 모순을 날카롭게 짚어 낸다.
7절 — 욕견현인이불이기도(欲見賢人而不以其道) — 의는 길이고 예는 문이다
원문
欲見賢人而不以其道면猶欲其入而閉之門也니라夫義는路也오禮는門也니惟君子能由是路하며出入是門也니詩云周道如底하니其直如矢로다君子所履오小人所視라하니라
국역
맹자는 현자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그 도리로 하지 않는 것은, 그가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문은 닫아 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義(의)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이고 禮(예)는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니, 군자만이 그 길로 걷고 그 문으로 드나든다는 것이다. 이어 시경 구절을 인용해 곧고 평평한 길은 군자가 실제로 걷는 길이며, 소인은 그저 바라볼 뿐이라고 덧붙인다. 현자를 만나고 싶다면 먼저 의와 예의 길과 문을 열어야 한다는 뜻이다.
축자 풀이
欲見賢人而不以其道(욕견현인이불이기도)는 현자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그 도리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猶欲其入而閉之門(유욕기입이폐지문)은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문을 닫는 것과 같다는 비유다.義 路也(의 노야)는 의가 길이라는 뜻으로, 행위의 바른 방향을 가리킨다.禮 門也(예 문야)는 예가 문이라는 뜻으로, 관계가 성립하는 입구를 말한다.君子所履 小人所視(군자소리 소인소시)는 군자는 그 길을 실제로 걷고 소인은 보기만 한다는 말이다.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절을 장 전체의 총결론으로 읽는다. 義路禮門(의로예문)은 인간관계와 정치질서가 서는 가장 기본 구조이며, 현자를 대하는 일도 그 구조를 벗어나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시경 인용은 이 길이 옛 성왕의 공도였음을 뒷받침한다.
송대 성리학은 이 비유를 마음공부와 연결해 읽는다. 길과 문은 단지 외형적 절차가 아니라, 내면의 공경과 판단이 외부로 드러나는 통로라는 것이다. 성리학적 독법에서 군자는 의와 예를 알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걷는 사람이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에서도 좋은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면, 먼저 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존중 없는 문화, 불분명한 절차, 권위적 호출 방식은 문을 닫아 놓고 인재가 오길 바라는 것과 같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관계는 의도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를 맞이할 준비, 곧 바른 방식과 문을 열어 두는 일이 필요하다. 맹자는 바로 그 준비를 義(의)와 禮(예)로 설명한다.
8절 — 공자는군이명소어시든(孔子는君이命召어시든) — 공자의 경우는 왜 다른가
원문
萬章이曰孔子는君이命召어시든不俟駕而行하시니然則孔子非與잇가曰孔子는當仕有官職而以其官으로召之也니라
국역
만장은 공자가 임금의 명으로 부르면 수레 멍에를 갖출 틈도 없이 곧장 갔다는 사실을 들어,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와 모순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맹자는 그때 공자는 이미 벼슬하고 있었고, 임금이 바로 그 관직을 통해 부른 것이므로 전혀 다른 경우라고 답한다. 즉 관직 안의 공식 소명과, 초야의 현자를 예 없이 불러들이는 일은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축자 풀이
君命召(군명소)는 임금이 명하여 부른다는 뜻으로, 공식적 명령을 가리킨다.不俟駕而行(불사가이행)은 수레를 멍에할 틈도 없이 곧장 갔다는 뜻이다.然則孔子非與(연즉공자비여)는 그렇다면 공자도 잘못한 것이냐는 만장의 반문이다.當仕有官職(당사유관직)은 마침 벼슬하여 관직이 있었다는 뜻이다.以其官召之(이기관소지)는 그 관직을 통해 불렀다는 뜻으로, 공식 직무 호출임을 밝힌다.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절을 예외가 아니라 정확한 구분의 확인으로 읽는다. 공자는 이미 관직 안에 있었으므로 군주의 부름은 사적 소환이 아니라 공적 직무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선 논의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정리된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도 같은 점을 강조한다. 형식은 비슷해 보여도 그 관계가 이미 직무 안에 성립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의와 예의 판단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독법은 이를 권한과 명분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사례로 읽는다.
현대적 해석·함의
조직에서도 공식 역할 안의 호출과 비공식적 압박은 구분돼야 한다. 같은 상사의 연락이라도 직무 수행을 위한 정당한 호출인지, 개인적 위계 남용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절은 맥락을 놓치지 말라고 말한다. 겉모습만 비슷하다고 같은 행동으로 볼 수는 없으며, 관계가 어떤 명분 위에 서 있는지 끝까지 따져야 한다.
만장하 7장은 현자를 만나고 쓰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그것이 義(의)와 禮(예)의 문을 통하지 않으면 끝내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서인이 제후를 함부로 보지 않는 이유에서 출발해, 잘못된 부름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원칙, 그리고 義路禮門(의로예문)의 비유에 이르기까지 맹자는 만남의 형식 자체가 이미 정치와 도덕의 수준을 드러낸다고 본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장에서 군신과 사우의 명분을 가르는 예의 질서를 읽고, 송대 성리학은 여기에 군주가 현자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정치의 품격을 더 깊게 읽어 낸다. 두 독법 모두 같은 결론에 닿는다. 현인을 원한다면 먼저 그를 현인답게 대해야 하며, 부르는 예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예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언어로 옮기면, 존중은 내용만이 아니라 방식에서도 증명돼야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지혜와 덕을 원하면서도 편의적으로 다루면, 그 만남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맹자의 非招不往(비초불왕)은 관계의 문을 여는 방식부터 바르게 하라는 오래된 경고다.
등장 인물
- 맹자: 현자와 군주가 만나는 방식에도 예와 의의 기준이 있음을 밝히는 전국시대 유가 사상가다.
- 만장: 제후와 현자의 관계, 공자의 사례 등을 차례로 물으며 맹자의 논의를 이끌어 내는 제자다.
- 자사: 노목공의 방문과 벗함의 표현을 불쾌하게 여기며 현자를 대하는 군주의 예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 노목공: 자사를 자주 찾아가면서도 관계의 표현을 잘못 잡아 자사의 반응을 이끌어 낸 군주다.
- 제경공: 잘못된 표지로 우인을 불러 예의 문제를 드러내는 고사 속 군주다.
- 공자: 관직 안의 공식 호출과 예 없는 사적 소환을 구분하는 마지막 비교 사례로 등장하는 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