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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상으로

맹자 고자상 6장 — 인의예지(仁義禮智) — 공도자의 성론(性論) 종합과 맹자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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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고자상 6장 인의예지(仁義禮智) 대표 이미지

고자상 6장은 인간 본성이 선한가를 둘러싼 여러 입장을 공도자가 한꺼번에 제시하고,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을 통해 성선설의 핵심을 압축하는 장이다. 고자의 性無善無不善(성무선무불선)에서 시작해, 본성은 선하게도 불선하게도 될 수 있다는 견해, 선한 본성과 선하지 않은 본성이 따로 있다는 견해까지 차례로 펼쳐진다. 맹자는 이 복잡한 논의를 한 방향으로 모아, 인간 안에는 본래 선으로 향할 수 있는 네 가지 마음이 갖추어져 있으며 仁義禮智(인의예지)는 밖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장의 논쟁은 단순히 낙관적 인간관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왜 어떤 사람은 선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악하게 되는지, 환경과 지도자의 영향은 무엇이며, 타고난 자질과 후천적 선택은 어떻게 엮이는지를 함께 다룬다. 맹자는 환경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이 본성의 근본 구조 자체를 뒤집는다고 보지 않는다. 선하지 않게 되는 것은 타고난 바탕의 죄가 아니라, 주어진 가능성을 끝까지 펼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성선 논변의 총괄로 읽는다. 인간 안에 이미 측은, 수오, 공경, 시비의 단서가 있고, 이것이 각각 인의예지의 근거라는 설명이 중심이 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여기에 더해, 이 네 마음이 단지 감정의 순간이 아니라 인간 마음속에 갖추어진 도덕 원리의 발현이라는 쪽으로 읽는다. 그래서 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인의예지비유외삭아야)는 성리학 전체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 장이 고자상에서 특히 중요한 까닭은, 성선설이 현실의 악을 부정하는 이론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맹자는 악행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인간 본성의 본래 구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미 선의 근거를 갖고 태어나며, 문제는 그것을 찾고 기르느냐, 놓치고 잃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고자상 6장은 맹자 윤리학의 심장부에 놓여 있다.

1절 — 공도자왈고자왈(公都子曰告子曰) — 고자는 본성에 선도 악도 없다고 말했다

원문

公都子曰告子曰性은無善無不善也라하고

국역

공도자는 먼저 고자의 말을 전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선도 없고 불선도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첫 절을 맹자가 반박할 대표 논적의 입장을 요약한 문장으로 본다. 고자는 성을 물과 같은 자연적 바탕처럼 이해하여, 그 자체에는 선과 악의 도덕 규정을 붙일 수 없다고 본 것으로 읽힌다. 따라서 이 입장은 인간의 행위가 선하거나 악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본성의 본래 성질로까지 돌릴 수는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견해를 성과 정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논의로 본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 자체를 이미 하늘의 이치와 연결된 도덕적 구조로 이해하기 때문에, 본성을 가치중립으로 보는 순간 인의예지의 근거도 흔들린다고 본다. 그래서 이 첫 문장은 뒤이어 맹자가 제시할 네 마음의 논증을 불러내는 출발점이 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사람을 완전히 중립적 재료처럼 보는 관점의 한계를 떠올리게 한다. 구성원을 단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는 존재로만 보면, 조직은 사람 안의 자발적 책임감과 양심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맹자는 바로 그 지점을 문제 삼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사람은 원래 그냥 빈 그릇일 뿐”이라는 생각은 편해 보이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도덕적 가능성에 대한 책임도 약하게 만든다. 이 절은 맹자가 왜 인간 안에 이미 선의 근거가 있다고 보려 했는지를 준비하는 질문이 된다.

2절 — 혹왈성가이위선(或曰性可以爲善) — 어떤 이는 본성이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원문

或曰性은可以爲善이며可以爲不善이니是故로文武興則民이好善하고幽厲興則民이好暴라하고

국역

어떤 사람은 본성이 선하게도 될 수 있고 선하지 않게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문왕과 무왕 같은 임금이 나타나면 백성이 선을 좋아하고, 유왕과 여왕 같은 임금이 나타나면 백성이 포악함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정치 환경의 영향력을 크게 보는 입장으로 읽는다. 좋은 임금이 있으면 백성이 선해지고 나쁜 임금이 있으면 백성이 포악해진다는 설명은 현실 정치의 힘을 잘 짚지만, 맹자의 눈으로는 아직 본성 자체의 근거를 말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시 말해 이 견해는 변화의 조건은 설명하지만, 왜 인간이 선을 좋아할 수 있는지의 근본은 설명하지 못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환경의 영향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영향이 가능한 이유 역시 인간 안에 이미 선을 향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문무의 정치가 백성을 선으로 이끄는 것은 백성 안에 선의 단서가 있기 때문이지, 원래 아무 방향도 없던 본성을 바깥에서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문화와 리더의 영향이 사람을 크게 바꾼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좋은 기준과 좋은 리더십은 구성원의 선한 면을 끌어내고, 나쁜 리더십은 사람을 거칠고 공격적으로 만들 수 있다. 다만 맹자의 관점에서는 이런 설명만으로는 왜 사람들이 선한 질서에 응답하는지까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환경은 분명 중요하다. 어떤 관계와 어떤 공동체 안에 있느냐에 따라 내가 드러내는 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이 절은 동시에 묻게 만든다.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면, 그 변화에 응답할 수 있는 바탕은 애초에 어디에 있는가.

3절 — 혹왈유성선유성불선(或曰有性善有性不善) — 사람마다 본성 자체가 다르다는 주장

원문

或曰有性善하며有性不善하니是故로以堯爲君而有象하며以瞽瞍爲父而有舜하며以紂爲兄之子오且以爲君而有微子啓王子比干이라하나니

국역

또 어떤 사람은 선한 본성을 가진 사람도 있고 선하지 않은 본성을 가진 사람도 따로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 임금 같은 성군 아래에서도 상 같은 인물이 있었고, 고수 같은 아버지 밑에서도 순 같은 아들이 있었으며, 주왕 같은 폭군과 가까운 혈연과 군주의 자리 아래에서도 미자 계와 왕자 비간 같은 어진 인물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예외 사례를 통해 본성의 차등을 설명하려는 입장으로 읽는다. 즉 같은 환경에서도 다른 사람이 나오고, 악한 환경에서도 선한 사람이 나오니 사람마다 본성 자체가 다르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어서 이런 차이를 성의 본질 차이로 환원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견해를 더 강하게 비판한다. 사람마다 기질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성의 근본은 모두 같아야 인의예지의 보편성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여기서 성과 기질을 구분하여, 선과 불선의 차이는 근본 성의 차이가 아니라 기질과 실천의 차이에서 생긴다고 읽는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원래 좋은 사람”과 “원래 안 되는 사람”으로 사람을 구분해 버리는 태도의 위험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사람마다 기질과 반응은 다르지만, 그것을 본질적 도덕 운명으로 고정해 버리면 교육과 수양, 제도의 역할은 크게 줄어든다. 맹자는 바로 그런 고정을 경계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누군가는 원래 착하고 누군가는 원래 그렇지 않다고 쉽게 단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절을 지나 맹자의 대답으로 들어가면, 그는 그런 단정이 인간 안의 더 깊은 공통 바탕을 놓치게 만든다고 본다.

4절 — 금왈성선(今曰性善) — 맹자가 말하는 성선은 정(情)을 따라 드러나는 선이다

원문

今曰性善이라하시니然則彼皆非與잇가孟子曰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니乃所謂善也니라

국역

공도자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지금 선생님이 말하는 성선은 앞서 말한 견해들이 모두 틀렸다는 뜻이냐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정이 발로되는 모습을 따라 말하면 선하게 될 수 있으니, 바로 그것이 자신이 말하는 성선의 뜻이라고 답한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맹자가 성과 정을 연결해 설명하는 대목으로 본다. 본성은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실제 감정과 반응 속에서 드러나며, 그 발로를 보면 사람은 선을 향할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의 성선은 현실의 감정 경험을 무시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실제로 확인되는 선의 단서를 붙잡는 논의로 읽힌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을 성의 발현으로 읽는다. 정 그 자체가 곧바로 항상 완성된 덕은 아니지만, 그 바탕에는 이미 선한 구조가 있으므로 바르게 펼치면 인의예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은 이 절에서 성선설의 문을 여는 핵심 열쇠를 본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구성원이 부당함을 보면 불편해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 조직은 아직 선의 바탕을 잃지 않은 것이다. 맹자는 그 반응을 교육과 제도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나는 원래 선한가를 막연히 따지기보다, 내 마음이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는 편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맹자의 성선설은 완벽함의 선언이 아니라, 선을 향해 반응하는 내 마음의 방향을 발견하라는 요청에 가깝다.

5절 — 약부위불선(若夫爲不善) — 악행은 타고난 바탕의 죄가 아니다

원문

若夫爲不善은非才之罪也니라

국역

하지만 사람이 불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타고난 자질과 성정 자체의 죄는 아니라는 것이 맹자의 결론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짧은 절을 앞선 여러 반례를 정리하는 판정문으로 읽는다. 현실에 악행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악하거나 악선이 섞여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악행은 본래 바탕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결과로 이해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절을 성과 기질, 성과 욕망의 구분과 연결한다.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만, 기질의 혼탁함과 사사로운 욕심이 그것을 가리면 악행이 나올 수 있다. 그렇더라도 책임은 본성의 구조가 아니라, 그 본성을 보존하고 확충하지 못한 데 있다는 식으로 읽는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누군가의 잘못을 곧바로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으로 환원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잘못된 행동은 분명 책임져야 하지만, 그것을 곧장 인간 본질의 판정으로 바꾸는 순간 교정과 성장의 가능성은 닫힌다. 맹자는 행동의 책임과 본성의 가능성을 구분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내가 잘못했다고 해서 내 존재 전체가 악한 사람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맹자의 말은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잘못을 바탕의 운명으로 돌리지 말고 다시 선의 가능성을 일으키라는 요구로 읽힌다.

6절 — 측은지심인개유지(惻隱之心人皆有之) — 사단은 인의예지의 내적 근거다

원문

惻隱之心을人皆有之하며羞惡之心을人皆有之하며恭敬之心을人皆有之하며是非之心을人皆有之하니惻隱之心은仁也오羞惡之心은義也오恭敬之心은禮也오是非之心은智也니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라我固有之也언마는弗思耳矣니故로曰求則得之하고舍則失之라하니或相倍蓰而無算者는不能盡其才者也니라

국역

맹자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고 미워할 줄 아는 마음, 공경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사람마다 모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네 마음이 바로 인, 의, 예, 지의 단서라고 밝힌다. 인의예지는 밖에서 나에게 스며든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인데, 다만 그것을 제대로 생각하고 붙들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고 말하며, 사람들 사이의 선악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것은 타고난 바탕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성선설의 실증적 근거로 읽는다. 누구나 측은, 수오, 공경, 시비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인의예지의 보편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求則得之 舍則失之는 선의 단서가 자동으로 완성되는 덕이 아니라, 찾고 보존해야 하는 가능성이라는 뜻을 지닌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절을 인간 마음속에 이미 도덕 원리가 완비되어 있다는 선언으로 읽는다. 네 마음은 단순한 감정 조각이 아니라, 인의예지라는 사덕의 발단이다. 성리학은 특히 非由外鑠我也를 중시하여, 도덕은 외부 명령의 강제가 아니라 내면의 본래 구조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수양은 새것을 집어넣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보존하고 확충하는 작업이 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구성원에게 윤리를 단지 외부 규정으로만 강제하려는 접근의 한계를 보여 준다. 사람 안에 이미 부당함을 싫어하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마음이 있다는 전제 위에서 제도를 설계할 때, 조직 문화는 훨씬 깊이 작동한다. 맹자의 통찰은 규범을 주입하기보다 내적 동기를 깨우는 쪽에 가깝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내가 더 나아질 수 있는 근거는 밖에서 새로운 도덕을 받아와야 해서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감각을 제대로 붙드는 데 있을 수 있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움직이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공경할 줄 아는 마음,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아직 길은 남아 있다는 뜻이다.

7절 — 시왈천생증민(詩曰天生蒸民) — 시경과 공자가 말하는 보편적 덕의 근거

원문

詩曰天生蒸民하시니有物有則이로다民之秉夷라好是懿德이라하여늘孔子曰爲此詩者여其知道乎인저故로有物이면必有則이니民之秉夷也故로好是懿德이라하시니라

국역

맹자는 마지막으로 시경을 인용한다. 하늘이 백성을 낳았으니 사물마다 법칙이 있고, 사람은 떳떳한 본성을 지니고 있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게 된다는 노래다. 공자 역시 이 시를 지은 사람이 도를 안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고 사람은 떳떳한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마땅히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맹자는 이 인용으로 성선설이 자신의 독창적 주장만이 아니라 시와 공자의 해석 속에서도 이미 확인된다고 보여 준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성선설의 경전적 근거 제시로 읽는다. 인간에게 떳떳한 본성이 있으며, 그 본성 때문에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게 된다는 점이 이미 시경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공자의 평은 맹자의 논의가 사사로운 견해가 아니라 옛 성현의 도와 이어진다는 보증으로 기능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有物有則을 더욱 형이상학적으로 읽는다. 만물에는 각각 마땅한 법칙이 있고, 인간에게는 그 법칙이 도덕적 본성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마음은 우연한 취향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 자체에서 나오는 응답으로 이해된다. 성리학은 이 구절을 인간 본성과 천리의 일치를 보여 주는 근거로 중시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에서는 사람들이 결국 좋은 기준과 좋은 덕을 알아보고 좋아할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를 제공한다. 냉소적으로 보면 사람은 이익만 좇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정함과 품격, 진정성을 알아보고 그쪽에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많다. 맹자는 바로 그 가능성을 인간의 본래 구조 안에서 찾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이 절은 위안이 된다. 내가 좋은 것을 좋다고 느끼고, 아름다운 덕을 향해 마음이 끌리는 일이 억지 학습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는 이미 그쪽을 좋아할 수 있는 바탕이 있고, 수양은 그 바탕을 더 분명히 살리는 일이라고 읽을 수 있다.


고자상 6장은 성무선무불선설, 가이위선가이위불선설, 유성선유성불선설을 차례로 검토한 뒤, 맹자의 성선설을 가장 분명한 형태로 제시한다. 한대 훈고 전통은 네 마음을 인의예지의 실제 단서로 읽으며, 성선설을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인간 마음의 구조로 이해한다. 송대 성리학은 그 위에 인간 본성과 천리의 일치라는 더 큰 틀을 얹어, 인의예지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아니라 본래 갖추어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장이 오늘도 강한 이유는, 인간의 악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안의 선의 근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맹자는 사람을 순진하게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악행이 본성의 본래 모습은 아니며, 사람은 이미 선을 향할 수 있는 마음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仁義禮智(인의예지)는 강요된 규범이 아니라, 잃어버렸을지라도 다시 찾을 수 있는 인간의 본래 자산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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