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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상으로

맹자 진심상 39장 — 삼년지상(三年之喪) — 제선왕이 삼년상(三年喪)을 줄이려 할 때 타협의 한계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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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진심상 39장 삼년지상(三年之喪) 대표 이미지

맹자 진심상 39장은 부모의 상을 셋째 해까지 지키는 三年之喪(삼년지상)을 둘러싼 짧지만 날카로운 문답이다. 제선왕(齊宣王)이 상기를 줄이려 한다는 상황에서, 공손추는 일단 1년상이라도 완전히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언뜻 보면 현실적인 절충처럼 들리지만, 맹자는 그런 말 자체가 잘못의 방향을 바로잡지 못하는 어설픈 타협이라고 본다.

이 장의 핵심은 두 경우를 구별하는 데 있다. 하나는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으려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하고 싶지만 제도와 상황 때문에 정말 다 할 수 없는 경우다. 맹자는 앞의 경우에는 단순히 조금 덜 나쁘게 하라고 조언할 것이 아니라, 아예 효와 공경의 도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뒤의 경우처럼 어쩔 수 없는 제약 속에서라도 상기를 더하려는 마음은 전혀 다른 문제로 다루어진다.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장을 예의 본뜻과 현실 사정의 차이를 세밀하게 구별한 문답으로 읽는다. 朞之喪(기지상)을 무작정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 때문에 상기를 줄이려 하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독법에서 형의 팔을 비트는 사람에게 그저 천천히 하라고 말하는 비유는, 본래 잘못된 방향을 조금 완화한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효의 진심과 제도적 제약을 함께 고려하는 사례로 읽는다. 효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이므로, 할 수 있음에도 줄이려 하는 것은 본심의 박함을 드러내지만, 마음은 다하고 싶으나 예제와 압존 때문에 다할 수 없는 경우는 그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마지막 절의 雖加一日 愈於已(수가일일 유어이)는 무조건 짧게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불가피한 한계 안에서도 더하려는 정성을 귀하게 보는 말로 이해된다.

진심상의 흐름 안에서 이 장은 예를 문자적으로만 다루지 않고, 그 예를 둘러싼 마음의 방향을 보게 한다. 아래 네 절은 제선왕의 단상 의도, 맹자의 강한 반박, 왕자의 특수한 사례, 그리고 두 경우를 가르는 최종 설명을 차례로 따라가며, 왜 三年之喪이 단순한 기간 문제가 아니라 효의 진심을 시험하는 기준이 되는지를 드러낸다.

1절 — 제선왕욕단상(齊宣王欲短喪) — 일 년상이라도 낫지 않겠느냐는 질문

원문

齊宣王이欲短喪이어늘公孫丑曰爲朞之喪이猶愈於已乎인저

국역

제선왕이 삼년상을 줄이려 하자, 공손추가 묻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기년상, 곧 일 년상이라도 치르는 편이 아예 상을 그만두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겠습니까 하는 질문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첫 절을 예의 기준을 현실적으로 완화하려는 물음으로 본다. 공손추의 질문은 불효를 옹호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아예 상을 폐하는 것과 부분적으로라도 지키는 것 사이에서 차등을 둘 수 있지 않느냐는 실용적 문제 제기라는 것이다. 이런 독법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맹자의 대답이 더 강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고 본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마음의 방향을 묻는 질문으로 읽는다. 겉으로는 愈於已(유어이), 곧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이 타당해 보여도, 그 물음이 정말 효를 다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최소 기준만 찾으려는 데서 나온 것인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첫 절은 예의 기간보다 예를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먼저 문제라는 점을 드러내는 문턱이 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원칙을 대할 때 “완전히 안 하는 것보다는 조금 하는 게 낫지 않나”라는 식의 타협 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점진적 개선이 의미가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질문 자체가 본질을 흐릴 수 있다. 맹자는 바로 그 구분을 엄격하게 따지려 한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우리는 자주 최소한의 형식만 남기고 본뜻은 줄여 버리는 식의 합리화를 한다. 조금 하는 것이 전혀 안 하는 것보다 나을 때도 분명 있지만, 그 말이 내 책임을 덜어 주는 자기 위안으로 쓰일 때도 있다. 이 절은 그런 미묘한 자기기만의 가능성을 먼저 드러낸다.

2절 — 맹자왈시유혹(孟子曰是猶或) — 형의 팔을 비트는 자에게 천천히 하라 할 수는 없다

원문

孟子曰是猶或이紾其兄之臂어든子謂之姑徐徐云爾로다亦敎之孝弟而已矣니라

국역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형의 팔을 비틀고 있는데, 그에게 다만 좀 천천히 비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해야 할 일은 폭력을 조금 완화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에게 효와 공경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비유를 통한 단호한 판정으로 읽는다. 형의 팔을 비트는 행위는 본래 그 자체가 그릇된 것인데, 그릇된 방향을 조금 약하게 하라고 권하는 것은 근본을 놓친 처방이라는 것이다. 이런 독법에서 孝弟(효제)를 가르쳐야 한다는 말은, 상기의 길고 짧음 이전에 부모 형제에 대한 근본 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마음의 방향이 어긋난 상태에서는 절충이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고 읽는다. 상기를 줄이려는 마음이 이미 효의 본심에서 멀어져 있다면, 거기에 기간만 조금 덧붙여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맹자의 비유는 형식 조정이 아니라 심성 교정이 우선임을 드러내는 말이 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방향을 두고 “조금 덜 나쁘게 하자”는 식의 접근이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어떤 문제는 속도 조절이나 강도 완화가 아니라, 방향 자체를 바꾸는 교육과 기준 정립이 먼저 필요하다. 맹자는 바로 그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비슷하다. 누군가를 해치고 있으면서 단지 수위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 절은 잘못된 방향성 앞에서는 절충보다 먼저 기준을 다시 배우고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3절 — 왕자유기모사자(王子有其母死者) — 특수한 사례를 다시 묻다

원문

王子有其母死者어늘其傅爲之請數月之喪이러니公孫丑曰若此者는何如也잇고

국역

그때 마침 왕자 가운데 생모를 잃은 이가 있었고, 그 스승이 그 왕자를 위해 몇 달 동안의 상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청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공손추는,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또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하고 다시 묻는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절을 앞의 일반 논의에 예외적 상황이 제기되는 장면으로 본다. 왕자는 적모(嫡母)와 예제의 압존 관계 때문에 생모의 상을 온전히 다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어, 단순히 하기 싫어 줄이는 경우와는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독법에서 공손추의 재질문은 맹자의 원칙이 정말로 상황 구분을 허용하는지 시험하는 역할을 한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효의 뜻과 제도적 현실이 부딪히는 자리로 읽는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제도적으로 끝까지 할 수 없을 때, 그 마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왕자의 사례는 효를 형식만으로 재지 않고, 뜻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함을 보여 준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원칙을 적용할 때 상황과 제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같은 결과처럼 보여도 하나는 의지가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조적 제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수 있다. 맹자의 답은 바로 이 차이를 분명히 하는 데 있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행동 크기만 보고 마음까지 같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더 하고 싶어도 정말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절은 겉모양이 비슷해도 그 안의 뜻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4절 — 왈시욕종지이불가득야(曰是欲終之而不可得也) — 다하고 싶으나 못하는 경우는 다르다

원문

曰是欲終之而不可得也라雖加一日이나愈於已하니謂夫莫之禁而弗爲者也니라

국역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우는 상을 끝까지 다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경우이다. 그러니 비록 하루라도 더하는 것이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앞에서 말한 비판은, 아무도 막지 않는데도 스스로 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이라는 뜻이다.

축자 풀이

사상사 배경

한대 훈고 전통에서 조기의 『맹자장구』와 손석의 『맹자정의』 계열 독법은 이 마지막 절을 원칙과 예외를 가르는 정밀한 결론으로 본다. 하고 싶어도 예제상 다할 수 없는 경우라면, 짧더라도 더하려는 마음이 귀하며 加一日도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제선왕처럼 막는 이가 없는데도 스스로 줄이려는 경우는 성격이 전혀 다르므로,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송대 성리학에서 주희의 『맹자집주』와 정자 어록의 맥락은 이 대목을 효의 본심을 읽어 내는 해석으로 본다. 마음이 이미 끝까지 다하고자 하는 쪽에 서 있다면, 외적 제약 아래서 조금이라도 더하려는 행위는 본심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 독법에서 雖加一日 愈於已는 형식 축소를 허용하는 명분이 아니라, 제약 속 정성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이해된다.

현대적 해석·함의

리더십과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이 절은 같은 부분 실행이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하나는 원칙을 회피하려는 최소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제약 속에서도 원칙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이다. 좋은 판단은 결과의 크기만 보지 않고, 그 행동이 어떤 방향의 마음에서 나왔는지를 함께 살필 때 가능해진다.

개인과 일상에서도 “조금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말은 때에 따라 참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다. 진심으로 다하고 싶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을 때는 작은 실천이 귀하지만, 애초에 하려는 뜻이 없을 때는 그 말이 자기기만이 되기 쉽다. 맹자는 바로 그 차이를 이 절에서 또렷하게 갈라 놓는다.


맹자 진심상 39장은 삼년상의 길이를 말하는 듯하면서, 실은 효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장이다. 제선왕처럼 할 수 있으면서도 줄이려는 경우에는 “조금 덜 줄이라”는 말이 해결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효제의 근본을 다시 가르쳐야 한다. 반면 왕자의 사례처럼 끝까지 다하고 싶으나 제약 때문에 다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하루라도 더하려는 마음이 의미를 가진다.

한대 훈고 전통은 이 장에서 예의 본뜻과 현실 제약을 구별하는 정밀한 독법을 읽고, 송대 성리학은 그 위에서 효의 본심과 형식의 관계를 읽어 낸다. 두 독법은 모두 중요한 것이 단순한 기간의 길고 짧음이 아니라, 그 기간을 대하는 마음의 방향이라는 점에서 만난다. 그래서 三年之喪(삼년지상)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효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시금석이 된다.

오늘의 독자에게도 이 장은 익숙한 변명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할 수 있으면서도 덜 하려는 나태와, 다하고 싶지만 제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정성은 겉으로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르다. 맹자의 문답은 결국 이렇게 묻는다. 나는 지금 기준을 줄이려는가, 아니면 기준을 다하고 싶으나 정말 못하는가. 이 구별이 서지 않으면 절충도 쉽게 미덕의 얼굴을 한 자기기만이 된다.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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